관련 역사적 사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능주(현 화순군 능주면) 수령은 조존두(趙存斗)였음. 조존두에 따르면 1894년 7월에 동학농민군에 의해 총 28자루, 화양 20근, 연환 300개, 환도 3자루를 빼앗겼다고 보고함
화순과 능주 일대의 동학농민군은 장흥지역 전투에도 참가하였는데, 이들은 장흥과 보성 일대에 집결하여 벽사역 공격에 합류하기도 함. 화순 접주 김수근(金秀根)과 능주 접주 조종화(趙鐘化)는 금구의 김방서(金方瑞)와 함께 수천 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장흥 동학농민군에 합류함
그러나 1894년 12월 일본군과 경군이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내려오면서 화순‧능주 지역의 동학농민군의 기세가 약화되었고, 이때 많은 동학농민군이 체포되어 처형됨. 능주 접주였던 조종순은 1895년 1월 11일에 처혐됨
고증내용
「장계」: 전라도병마절도사가 올린 장계(1894년 10월 29일). 능주목사 조존두(趙存斗)의 첩보에, “지금 도착한 병사(兵使, 병마절도사)의 감결(甘結)에, ‘이번에 소중한 군기(軍器)를 잃어버리고 보고하지 않아 이처럼 막연하니 병영의 장교와 함께 조사한 뒤에 잃어버린 물건을 일일이 적어 성책(成冊)하여 보고하고 해당 감색(監色)도 바로 압송하여 올려보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해당 감색을 잡아들여 엄중하게 사정을 조사하였더니, 총 28자루·화약 20근·연환(鉛丸) 300개·환도(環刀) 3자루를 정말로 7월 초에 동도에게 잃어버렸습니다.
「駐韓日本公使館記錄」 1권: 2) 行全羅道觀察使 兼都巡察使 親軍武 南營外使 爲謄移事(1894년 10월 16일). 16일에 도착한 綾州牧使 趙存斗의 첩보 내용에는, “동학도 10여 명이 포를 쏘며 본 주로 들어와 남원 대도소 金開南의 지휘라고 하며 公兄들을 불러내어 동전 2만 냥과 白木 30同을 남원 會所로 수송하라고 공갈을 하며 재촉을 하였는데 그들이 부린 행패는 다 말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전라도각읍소획동도수효급장령성명병록성책」: 1895년 1월 전라도 각읍에서 노획한 동도의 수효와 장령의 성명을 적은 성책. 능주(綾州) 비괴(匪魁) 조종순(趙宗木筍)은 을미년(乙未年, 1895년) 1월 11일에 잡을 때 쏘아 죽였는데, 순포장(巡砲將) 최주화(崔周華) 등이 잡았다. 정□문(鄭□文)은 1월 17일에 잡아 가두고 조치하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