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1894년 12월 3일 일본군 대위 모리오 가이치(森眉雅一)가 이끄는 일본군이 담양에 도착하면서 담양일대의 동학농민군에 대한 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됨. 이때 창평 동학농민군 지도자 한충상(韓忠相)이 12월 6일 체포됨
이후 동학농민군 백처사(白處士), 조공서(曺公瑞), 장영옥(張永玉), 하재원(河在元), 김봉철(金奉哲), 백준수(白俊水), 한성옥(韓成玉), 원만석(元萬石), 이석용(李石用), 강판석(姜判石), 정영운(鄭永云)도 체포됨
고증내용
「영상일기」: 1894년 6월 초8일, 비가 내리다가 또 맑아졌다. 동학도가 다시 도당을 모아 태인(泰仁)에서 순창(淳昌)으로 들어갔다. 이보다 앞서 순창군수 이성렬(李聖烈)은 집으로 돌아갔다가 아직까지 관아에 돌아오지 않았다. 적들이 하루 머물다가 옥과(玉果)를 향해 갔는데, 담양(潭陽)·창평(昌平)·동복(同福)·낙안(樂安)·순천(順天)·보성(寶城)을 넘어 곡성(谷城)으로 들어갔다. 이들이 남원(南原)으로 진격한다고 큰소리를 치자 민심이 크게 동요하였다.
「순무선봉진등록」 제5: 1894년 12월 11일, 행 담양도호부사가 보고합니다. 놓친 동학의 죄인 가운데 광주 용귀동의 괴수 김형순(金亨順)·김문화(金文化) 등이 무리를 거느리고 창평(昌平) 용귀산(龍龜山)에 은거하였다고 하여 담양부의 수성군을 출동하여 연일 용귀산을 에워싸고 책략을 내어 뒤를 좇고 있거니와 이 산은 본디 큰 산으로 여러 봉우리가 깊숙하고 수목이 빽빽하여 달아나 숨으면 자취를 찾기 어려워서 아직 붙잡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혹 달아나면 방향을 바꿔 백양사(白羊寺) 등지로 향해 가서 체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놈들을 따른 몇 놈은 이미 먼저 잡아 방금 심문하여 공초를 받았습니다.
「전라도각읍소착동도수효급소획집물병록성책(全羅道各邑所捉東徒數爻及所獲汁物幷錄成冊)」: 1894년 12월, 창평(昌平) 거괴(巨魁) 한충상(韓忠相)은 12월 6일에 잡아서 결박하였다. 동당인 백처사(白處士)·조공서(曺公瑞)·장영옥(張永玉)·하재원(河在元)·김봉철(金奉哲)·백준수(白俊水)·한성옥(韓成玉)·원만석(元萬石)·이석용(李石用)·강판석(姜判石)·정영운(鄭永云) 등은 해당 현의 감옥에 엄중히 가두고 죄의 경중을 가려 처리하도록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