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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 정보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순천 낙안읍성 동학농민군 점령지 (사적, 순천시 낙안면 쌍청루길)
  • 지 역
  • 전남
  • 주 소
  •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쌍청루길 157-3
  • 문화재
  • 국가지정문화재(사적) 
  • 분 류
  • 점령지
  • 정 의
  • 순천 영호대도소의 동학농민군에 의해 점령된 곳
관련 역사적 사실
김인배(金仁培)는 1894년 9월 순천에 영호대도소를 설치하였고 이후 섬진강을 건너 하동과 진주 등 경상도 남부지역을 석권하고 있었음. 이때 영호대도소에 남아 있던 동학농민군은 낙안읍내의 부호들로부터 군수물자를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개시함
그러나 낙안군수 장교준(張敎駿)과 주민들은 동학농민군에 비협조적이었음. 이에 1894년 9월 15일 양하일(梁河一)은 동학농민군을 낙안과 순천의 중간지점인 선암사에 집결시켜 밤 8시경에 낙안읍 공격을 개시함
이때 동학농민군은 관아를 점령하였고, 의소(義所)의 김형수(金炯洙)를 처형하여 성 문루에 교수하기도 함. 이에 대응하여 민보군이 성 밖에 병력을 집결하여 농민군과 대치함.
1894년 9월 18일 낙안읍성의 동학농민군은 민보군의 포위를 뚫기 위해 공격을 개시하였고, 읍성의 무기고를 불태우고 군수물자를 징발하여 선암사로 복귀함
고증내용
「영상일기」: 1894년 6월 초8일, 동학도가 다시 도당을 모아 태인(泰仁)에서 순창(淳昌)으로 들어갔다. 이보다 앞서 순창군수 이성렬(李聖烈)은 집으로 돌아갔다가 아직까지 관아에 돌아오지 않았다. 적들이 하루 머물다가 옥과(玉果)를 향해 갔는데, 담양(潭陽)·창평(昌平)·동복(同福)·낙안(樂安)·순천(順天)·보성(寶城)을 넘어 곡성(谷城)으로 들어갔다. 이들이 남원(南原)으로 진격한다고 큰소리를 치자 민심이 크게 동요하였다.
「나암수록」: 1894년 10월, 전라감사의 서목에, “군기를 잃어버린 낙안군수 장교준(張敎駿), 옥구현감 김주호(金疇鎬), 함열현감 송주헌(宋胄憲)의 죄상을 모두 유사로 하여금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장계」: 1894년 10월 29일, 9월 20일에 내어 차례대로 도착한 낙안 군수(樂安郡守) 장교준(張敎駿)의 첩보에, “9월 15일 술시(戌時, 오후 7시~9시)쯤에 동학배(東學輩)1,000여명이 순천(順天) 선암사(仙巖寺)에서 각기 총과 칼을 소지하고 본군의 이교청(吏校廳)에 난입했는데 포소리가 진동하였고, 그들 중에 수 백명은 아전과 백성의 집에 흩어져 들어가서 재산을 약탈하였습니다. 사람을 만나면 쏘거나 찌르려고 하여 대부분 넋을 잃어버렸습니다. 저들이 바로 군기고(軍器庫)로 향해가서 문을 부수어 총·칼·탄환 등의 긴요한 물건을 일일이 찾아내어 가지고 나서 성문을 잠그고 성 머리를 겹겹이 둘러쌌습니다. 밤새 포를 쏘아 군(郡) 전체가 들끓는 듯하였습니다. 다음날 새벽녘에 본읍(本邑)의 의소(義所, 의병이 모인 곳인 듯)에서도 성(城)을 구하려고 성밖에 모여 며칠 동안 서로 대치하였습니다. 18일 미시(未時, 오후 1시~3시)쯤에 저들이 문을 열고 맹렬하게 나오는데 화살과 돌이 비처럼 쏟아졌고 함성은 땅을 울렸습니다. 본읍의 의소는 그들을 감당하기 어려운 형세여서 달아나서 각자 숨었습니다. 그사이에 포에 맞거나 찔려 죽은 자는 아직 그 수를 모르고, 저들이 도망하는 자를 추격하여 각 마을을 불태우고 재산·의복·농우(農牛) 등을 일일이 찾아내어 빼앗았습니다. 본읍 의소(義所)의 김형수(金炯洙)를 잡아가서 닫힌 문루에 이르러 목을 베어 장대에 내거니 아전과 백성은 얼굴빛이 달라졌고 온 성이 텅비었습니다. 19일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쯤에 무기고에 불을 지르고 서문(西門)을 활짝 열고서 많은 사람들이 선암사로 돌아갔는데, 가는 길에 나머지 무리들이 각 마을에 흩어져 들어갔으나 아직 그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순천접(順天接)·고산접(高山接)·남원접(南原接)·태인접(泰仁接)·금구접(金溝接)이라고 하여 그 명칭이 자주 바뀌고 무리들을 불러모아 의롭지 못한 큰 변고를 멋대로 저지르고 있습니다. 군수가 부임한 지 1달에 불과한 데, 이런 환난을 겪었습니다. 직분을 잃어버린 책임은 피하기 어려운 것이며 군기 약간과 남은 집물(什物)을 다시 거두어 들이고 소실된 집과 죽은 사람의 이름을 차례대로 조사하여 적어서 보고할 계획입니다. 그 연유를 첩보하고 또한 첩정(牒呈)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장계」: 1894년 10월 29일, 이어서 도착한 낙안군수의 첩보에, “9월 15일에 1,000여명의 동학배가 본군에 난입하여 군기를 빼앗고 사람을 죽였으며 각 마을에 불을 지르고 재산을 약탈한 연유는 벌써 치보(馳報)하였습니다. 아주 자그마한 고을이 여름부터 가을까지 여러 차례 환난을 겪은데다가 흉년을 만나 모양새를 갖출 수가 없는데, 더욱이 이번의 참혹한 피해에 읍과 촌(村)이 적막합니다. 직분을 잃어버린 것을 돌아보면 실제로 낯을 들어 백성을 대할 수가 없습니다. 19일 저들이 나간 뒤에 군(郡)안의 각 청(廳)과 각 면(面) 및 리(里)에서 죽음을 당한 사람과 소실된 집 및 빼앗긴 재산 등을 차례대로 조사하였습니다. 그 중 교궁(校宮)이 얼마나 존엄한 곳인데도 저들이 난입하여 문을 부수고 서책과 기명(器皿, 그릇)등을 별 어려움 없이 찾아내어 가져갔고 교임(校任)을 구타하여 9명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교청(吏校廳)의 창과 벽이 모두 망가졌고, 각종의 문적(文蹟)을 닥치는 대로 태웠습니다. 이민(吏民)의 집에서 재산과 의복을 약탈하여 상자에 담아 소와 말에 실은 것이 50여바리가 되었고, 사람을 붙잡아서 억지로 짐지게 한 것이 40여짐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값으로 말한다면 몇 만 냥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죽은 사람은 3명이고 소실된 집은 149채이며 빼앗긴 농우는 55마리입니다. 그밖에 부상을 당하거나 죽을 지경이 된 자가 수십명이 되지만 이민(吏民)이 흩어지고 인연(人煙, 인가에서 불을 때어 나는 연기)이 거의 끊어져서 정말로 어떻게 읍을 다스려야 할 지 몰라 근심스럽고 절박합니다. 이 연유를 첩보하고 아울러 첩정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논저
논문명(서명) 저자/필자 발행연도 쪽수
이상식 외 1996
사진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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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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