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이헌표(譜名:禎會, 1841~1909)는 중원군 신니면 선당리에서 태어났다. 1882년 동학에 입도하였고, 1892년 10월 동학 북접의 교수(敎授), 1893년 충주 접주를 지냈으며, 동학농민혁명 당시인 1894년 8월에는 괴산 접주의 직임을 맡고 있었다. 1894년 9월에 들어 기포하라는 최시형의 밀지를 받고 음성지역의 농민군 수백 명을 규합하여 보은으로 보낸 인물이다.
그의 증손자 이기준(1924년생,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용산리 462)에 따르면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헌표는 관의 탄압과 그가 규합하여 보낸 농민군들의 유족으로부터 원망을 받고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어 음성군 용산리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 관의 추적을 피해 이곳 저곳으로 피신하던 해월 최시형이 2달 정도 음성 용산리에 있던 이헌표의 집에서 피신한 적이 있으며, 이 때 최시형은 새끼를 꼬면서 은거하였다고 한다.
음성으로 이주한 다음에도 이헌표는 관의 탄압과 주변 사람들의 경계를 받아 많은 고초를 겪었다. 1903년경에는 토반(土班) 박천오(朴千五) 외 2인으로부터 모함을 받고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는 고초를 겪었다. 박천오 등은 이헌표가 동학교도들을 규합하여 음성군수 민진호(閔晉鎬)와 관속들을 타살하고 민가에 방화를 음모하였다는 것이다. 당시의 사정은 음성 이방(吏房) 최영주(崔永柱)가 쓴 「이곽포원록(李郭抱寃錄)」에 전하고 있다.
마을 입구 마을회관 앞 마을 자랑비 옆에 세운 이헌표 공적비는 증손자 이기준의 증언을 토대로 이헌표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고증내용
1894년에 동학 접주로 활동하던 이헌표(李憲表, 1841~1909) 집으로, 일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마을 입구에는 이헌표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