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무장기포 이후 동학농민군은 전라도의 각 군과 현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4월 21일 농민군에 의해 점령당한 무장관아는 고창과 흥덕관아의 경우보다 비교적 손실이 적었다. 이는 무장현 출신 농민군의 만류와 함께 농민군에 동조한 무장 서리들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농민군의 주요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무장관아는 명종 20년(1565)에 세웠으며 한때 무장초등학교 교실로 사용하다 현재 원형 복원되었다. 앞면 6칸, 옆면 4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며 ‘취백당(翠白堂)’ 현판이 걸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장중한 느낌을 주고 있는 조선시대 관아건축물이다.
고증내용
「兩湖招討謄錄」,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1, 2007, 111쪽.
4월 8일 술시 경에 동학배 수천 명이 곧바로 고창 관아에 들어와 무기를 탈취하고 여러 문서를 거두고 동헌과 각 관용건물을 부수고 9일 오시 경에 다시 무장읍(茂長邑)으로 향하였다는 내용 「兩湖招討謄錄」, 1894년(光緖 20) 4월 12일
「수록」 ,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3, 2008, 126쪽.
12일 진시(辰時) 동학배들이 난입하여 소란을 일으켰으며 이교(吏校)들이 잡혀 죽은 자가 10여 명이고, 촌락의 도록 사이에서 잡혀서 죽은 자가 수십 명이며 군기와 집물 및 화약 등의 물건을 가지고 가서 남은 것이 없으며 각양 문서와 장부들은 고금의 문적들을 불태웠고, 사람의 목숨이 다치고 읍은 읍의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였다는 내용
「갑오사기」,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5, 2009, 70쪽.
4월 초8일 다음 날 농민군은 무장읍을 도륙하고 인가를 불사르며 노략질하는 것이 더욱 심하였고 이때 왕사(王師, 경군)의 행차가 이웃 경계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여항(閭巷)의 잔민들은 두려워하며 병사를 모으고 산길로 가서 노숙하는 자들이 많았다는 내용
황현,『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 김종익 옮김, 역사비평사, 2016, 147쪽.
동학의 무리가 무장현의 아전과 병사 10명을 죽였다는 내용
전라북도재판소 판사 이완용(李完用) 질품서 1899년 7월 12일 제15호 (사법품보 > 사법품보[司法稟報] > 사법품보 갑(甲) > 제49책)
・정읍의 최영두(崔永斗) 나이 73세
4월 21일에 흥덕과 고창의 경계 지역인 사기점(沙器店)에서 저녁을 먹고, 횃불을 들고 무장읍(茂長邑)으로 가니, 마침 관아는 비어 있고 백성들은 모두 놀라 흩어졌다는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