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여시뫼봉[狐山峰]은 무장면 신촌리에 있는 왕제산의 다른 이름이다. 무장포고 이후 고부, 태인, 부안 등지를 점령한 농민군은 황토현 전투에서 전라감영군을 대파하자 중앙정부는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고 정예군 800명을 인솔하고 진압하도록 하였다. 이때 관군이 정읍에 도착하자 농민군은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4월 9일 무장을 점령한 뒤 이곳에 진을 쳤다. 이곳에서 농민군은 군사훈련을 하며 본격적인 봉기를 준비하였다. 여시뫼봉은 무장기포의 현장인 구수내 마을에서 직선거리로 약 1Km정도 떨어졌으며 표고 152m의 야산으로 사방이 시야에 들어오는 군사적 요충지이다.
고증내용
『영상일기』 1894년 4월 16일
고부의 동학도들이 경병(京兵)이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밤을 틈타 도망가 무장의 산(여시뫼봉-호산봉) 가운데로 숨었다는 내용
「수록」,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 3 , 2008, 25, 30쪽.
4월 초9일 신시(申時) 무렵에 농민군 10,000여 명이 무장 읍내의 동헌과 각 관청에 난입하여 갇혀 있던 무리들을 모두 풀어주었고 한편으로는 읍에서 1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호산봉(狐山峰)에 진의 위세를 크게 벌였으며, 어떤 자는 갑옷을 입고 각각 총과 창을 가지고 있었다는 내용
「兩湖招討謄錄」,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 1 , 2007, 113.
주거지를 둘러싸고 성을 만들어 항상 총을 쏘고, 나머지 무리들을 요로(要路)에 보내어 관속들을 찾아내고, 한편으로는 읍에서 1리 쯤 되는 곳 호산봉(狐山峯, 여시뫼)에 진(陣)을 만들어 혹 갑옷이나 투구를 입고 각각 총과 창을 지니고 있다는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