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1894년(고종 31) 1월 고부에서 봉기한 농민들은 후임 군수 박원명의 설득으로 3월 초에 해산하였으나 안핵사 이용태가 고부봉기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농민들에 대한 횡포가 극심해지자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의 농민군 지도부는 무장현에 전라도 일대의 농민군을 결집시키고 3월 20일경 「무장포고문」을 발표하고 재봉기를 선언하였다. 무장기포는 고부 지역에 한정되었던 농민봉기가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새로운 국면의 출발점이 되었다.
고증내용
「수록」,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3, 2007, 5쪽.
무장현감 조명호(趙命鎬)의 보고 내용에 의하면 4월 16일 무장현 동음치면(冬音峙面) 당산(堂山) 땅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난류배(亂類輩) 수천 명이 무리를 모아 가까이 다가와 머무르고 있으며, 그들의 종적이 수상하다고 전하는 이야기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내용.
「갑오사기」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총서』 5, 2009, 70쪽.
정읍(井邑)의 손화중(孫和中)이 동도(東徒) 수 천 명을 환기시켜 인천강(仁川江, 인내)에서 고창읍(高敞邑)에 모였는데 동학란(東學亂)이 이로부터 시작이 되었다는 내용.
「전봉준판결선고서 원본」
4월 상순쯤에 피고가 직접 무리를 인솔하여 전라도 무장에서 일어났다는 내용.
황현,『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 김종익 옮김, 역사비평사, 2016, 125쪽.
봉준 등은 무장에서 큰 집회를 열고 그들의 생각을 민간에 알렸다는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