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1894년 10월초 충주 외서촌에서 정부군・일본군과 대치하면서 세력을 증대시키고 있던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동북부 일부지역의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집결지였던 외서촌을 떠나 보은으로 이동하기 위해 무극을 거쳐 음성 당동으로 이동하였다. 무극이 집결지가 된 것은 이 지역이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로써 경기도 농민군이 충청도 농민군과 만나기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극장터는 각 지역 동학농민군이 보은 장내리로 가기 위하여 각지의 농민군을 집결시킨 장소이다.
옛날의 무극장터는 무극리 한 가운데를 흐르는 냇물 옆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수많은 농민들이 무극장터에서 식량이나 주거 등을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진천 구만리 장터에 나눠서 주둔하였다. 음성 무극장터와 진천 구만리 장터에 모인 농민군은 10월 10일경 충청도 농민군의 전체 집결지인 보은으로 향해 떠났다.
그뒤 12월 17일 보은 북실전투에서 패배한 일부 동학농민군이 충주 외서촌으로 향하던 중 청주의 관병과 일본군이 무극장터에 도착하여 협공하자, 나머지 무리들은 후퇴하여 충주 사창리로 피신한 사실도 있다.
고증내용
1894년 9월 18일 동학교단에서 기포령을 내린 후 충북 북부와 경기도에서 황산에 모인 동학농민군들이 분산 주둔하였던 곳으로, 현재 무극시장이 들어서 있다. 무극시장은 무극장의 중심지로 싸전과 잡화, 어물전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우체국·금융조합 등이 있다. 한쪽 옆에는 아케이드로 덮은 시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