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1년여 전인 1893년 2월 11일 서울 광화문에서는 동학교단을 대표하는 9명이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복합상소에 나섰다. 동학은 나라에서 국법으로 금했으나 그 세력이 점차 커졌고 1892년에는 공주와 삼례에서 교조신원운동이 대규모로 일어나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동학교단은 이듬해인 1893년 2월 이 성과를 바탕으로 왕에게 직접 상소를 올리는 광화문 복합상소를 전개했다. 복합상소의 내용은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의 신원과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을 중지해 달라는 것이었다.
광화문 복합상소가 벌어진 2월 11일 전후로 서울의 각국 공사관 거리에 척왜양 방문이 붙었다. 그리고 3월 6일에는 전라감영에 보낸 척왜양 통문이 바로 이곳 부산성문에 붙여졌다. 다만 당시 부산에는 동학 세력이 없을 때였는데 누가 방문을 붙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