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동학농민군과 정부가 전주에서 화약을 맺은 후 집강소 통치기에도 농민군의 투쟁은 강력하게 전개되었다. 1894년 9월 진주 일대에서는 농민군의 활동이 매우 활발했다. 9월 17일에는 외지에서 동학도 수천 명이 하동을 거쳐 진주로 들어와 각 관청에 접소(接所)를 설치하였고, 다음날 18일에는 영호대접주(嶺湖大接主) 김인배(金仁培)가 천여 명을 이끌고 진주성에 들어왔다.
조정과 감영에서는 경남지역의 동학군 봉기 소식을 듣고 대구판관 지석영(池錫永)을 토포사(討捕使)로 내정하여, 일부 군병을 이끌고 진주, 하동 등지로 가서 일본군과 협동하여 동학군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또 9월 25일 부산에서 일본군 3개 소대 150명이 배편으로 창원 마산포에 도착하여 한 부대가 먼저 29일 하동으로 진출했다. 부산지역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직접적인 봉기는 없었으나 부산항에 정박 중이던 일본 군함이 일본인 거류민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실탄 사격 등을 하며 지원했다. 부산의 일본군들은 바로 이곳에서 진주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영사관터에 주둔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