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용담현은 1894년 1차 기포 후 동학농민군에게 점령된 곳이었지만, 8월 이후 동학농민군의 집중력이 느슨해진 뒤부터 관에서 치안을 유지하게 됨. 그러나 1894년 11월 8일부터 진안, 고산, 진산, 금산 등지의 동학농민군이 충청도 옥천 방면에서 내려오던 일본군에 밀려 용담까지 후퇴함
동학농민군이 용담현 북쪽에서 진격을 시작하면서 관군과 교전함. 그러나 무주접주 이응백이 동학농민군 수천 명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면서 승세는 동학농민군에게 기울게 됨
관군과 전투는 2일간 이어지게 되었고, 동학농민군은 11월 9일 용담현을 점령함. 기록에 따르면 공청 44칸과 인가 470호가 불타고 17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짐. 용담향교는 용담 전투 당시 용담관아 인근에 있었으며, 이때 용담 전투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됨
용담향교는 용담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1998년 현위치로 이건한 것임
고증내용
「순무선봉진등록」 제6: 갑오 12월 22일. 용담현령이 보고합니다. 방금 도착한 비밀 공문에 따라, 동도 중에 이름 있는 거괴와 각처에서 못된 짓을 한 접주를 잡아들이는 일은 말씀대로 시행할 계획입니다. 용담현은 10집만 남은 잔폐한 마을로 비류가 침략한 것이 처음부터 몇 차례인지 알지 못하겠으며 저들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8월 이후로 엄히 더욱 성을 지켰습니다. …(중략)…지난 달 초 8일에 진안, 고산, 진산, 금산 등지의 각 포(包)의 동도 수만여 명이 북쪽으로부터 침입하여 부대를 마주하고 접전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주의 접주 이응백 삼부자는 그 무리 수천여 명을 이끌고 동으로부터 느닷없이 침입하여 우리 뒤편을 공격하였습니다. …(중략)…불에 탄 관아 건물이 44칸이며, 인가는 470호이며, 해를 입은 인명은 17명입니다.
「별계」: 갑오년 11월 18일 봉계. 호남의 동도들이 금산(錦山)을 함락시키고 연이어 장수(長水)까지 미쳤으며 이달 10일에는 또 용담(龍潭)을 함락시켰습니다. 사방에서 불러 모은 패거리의 수효가 수만 명이나 되는데, 한편으로는 운봉(雲峯)을 범접(犯接)하고 한편으로는 본 안의현의 경계를 엿보면서 노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