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원평의 접주 김덕명이 태어난 곳이다. 이곳은 금산사 입구 용계마을로 김덕명의 호가 용계인 까닭이다. 김덕명은 원평의 동학접주로 활동하면서 1893년 금구·원평집회에 참여하였고, 백산대회에서 총참모로 추대되어 군량미 공급과 금구 일대의 농민군 규합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황토현전투, 장성전투, 전주성 점령 등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원평에서 집강소 핵심 지도자로서 많은 군수품을 거두었고 폐정개혁에 앞장섰다.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한 후 전봉준보다 먼저 원평으로 돌아와 농민군 소집 및 군량미 비축 전투태세를 갖췄다. 11월 25일 벌어진 원평에서의 전투에서 패한 후 이은 이틀 후의 태인 전투에서도 패배하자 김덕명은 집안 재실이 있는 안정사 절골에 은신하였다. 1895년 1월 1일 태인 수성군에 의해 체포되어 전봉준과 함께 3월 29일 교수형을 당하였다.
원평집회터 구미란 전적지와 동쪽으로 불과 1km 정도 떨어져 있는 생가터에는 현재 ‘오성제과’가 자리잡고 있어 당시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다.
고증내용
『갑오약력』,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 5, 2009, 76쪽.
1894년 월미상 일미상 에는 초기의 주동자는 금구의 김덕명 무장의 손화중, 태인의 김개남으로 각기 수천 명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내용
「천도교서」,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 13, 2015, 271쪽.
6월에 금구 도인 김덕명이 여름옷 다섯 건으로써 신사께 바쳤다는 내용
「김낙봉 이력」,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 5, 2009, 220쪽.
다음해 신묘년(辛卯年, 1891) 5월에 대신사와 대교주께서 부안에 오셔서 며칠 동안 계시다가 금구(金溝)로 가서 김덕명(金德明)의 집에 머물렀다는 내용
오지영, 『동학사』(초고본), 동학농민전쟁사료대계1 (서울: 여강출판사, 1994), 456~457쪽 참조.
백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