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신헌(1810~1884)은 조선 후기의 무신이자 외교관으로<강화도조약>과 <조미수호통상조약> 당시에 조선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본관은 평산. 초명은 관호(觀浩). 자는 국빈(國賓), 호는 위당(威堂)·금당(琴堂)·동양(東陽)·우석(于石) 등이다.
신헌의 아들 신정희(申正熙, 1833~1895)는 당대 최고의 무관인 신헌(申櫶)의 큰아들로 진천 이월면 노원리에서 세거한 평산신씨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조선의 치안과 국방 책임을 맡았는데, 1893년 봄에는 서울로 올라가 복합상소를 하는 동학도인을 해산시켰다. 1894년 전국 각지에서 동학농민혁명군이 봉기하고, 호남 · 호서의 동학농민혁명군들이 논산에 집결, 공주성을 공격할 기세를 보이자, 9월 22일 정부는 동학농민혁명군을 진압하기 위해 최고 군사지휘부인 양호도순무영을 설치한 뒤 요즘의 사령관 지위인 양호순무사(兩湖巡撫使)로 호위부장 신정희를 임명하여 동학농민혁명군 토벌 임무를 부여하였다. 신정희는 정인표(鄭寅杓, 1855~1935)를 종사관으로 임명한 뒤 본격적인 동학농민혁명군 진압에 들어갔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동학농민혁명군은 진천 이월 노원리 도순무사 신정희의 고향과 집을 습격하여 소란을 피웠다.
건립 당시에는 "ㄱ"자형으로 된 사랑채와 행랑채, 안채, 중문 등이 있었으나 사랑채, 안채 등은 1920년대에 해체되어 진천 읍내의 길상사를 다시 짓는데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ㄱ"자형의 안채 주변에는 동남쪽으로는 중문과 광채가 있고 나머지는 막돌로 쌓은 담장이 장방형을 이루면서 이어져 있다. 안채는 가운데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측에 온돌방에 배치하였다. 구조는 장대석을 2단으로 쌓은 기단 위에 네모난 주춧돌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으며. 지붕은 우측은 맞배지붕이고 좌측은 팔작지붕으로 홑처마이다.
이 건물은 1850년대 지방의 전통적인 주택건축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동학 유적지로서의 관련된 사실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앞으로 보존 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
고증내용
1894년 9월 22일 조선정부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임명한 양호순무사(兩湖巡撫使) 신정희의 향리 저택으로 재임시 동학농민군이 습격한 집으로, 현재 거주하고 있는 방관석씨(1949년생)의 증언에 따르면, 신헌 고택은 약 150여년 전에 지어졌으며, 약 100년 전에 현재의 방씨 일가가 이주하였다. 고택 바로 위로는 신잡의 영정이 모셔진 제실이 있으며, 제실 옆에는 관리사무소가 있다. 고택은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