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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 정보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남원성 동학농민군 점령지
  • 지 역
  • 전북
  • 주 소
  • 전라북도 남원시 동충동 385-2일대
  • 문화재
  • 분 류
  • 점령지
  • 정 의
  • 동학농민군이 점령하여 전라좌도대도소를 설치하였던 곳
관련 역사적 사실
전주화약 이후 김개남을 주축으로 전라좌도 대도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추진한 곳이자 농민군과 반농민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또한 남원성 점령 후 전봉준과 함께 남원대회를 이끌었던 곳이다.
1894년 6월 25일 김개남의 농민군은 남원성을 점령하고 8월 19일 이후 운봉의 박봉양이 이끄는 민보군과 맞서기 위해 재집결한 동학농민군은 9월 이후 일본군 격퇴를 목적으로 남원과 담양을 비롯한 구례, 태인, 임실 등 전라좌도 지역에서 각종 식량과 무기를 모으고 10월 14일에 남원을 떠나 출병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에 패배하였고, 남원지역 역시 운봉 지역의 박봉양(朴鳳陽)이 이끄는 민보군에 의해 혁명의 꿈이 좌절되고 말았다.
고증내용
「영상일기」,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5, 2009, 32‧34‧40쪽
1894년 8월 일 미상
남원에서의 김개남 침탈 내용(32), 적당이 날마다 모여들어, 교룡산성에 근거한 자가 수만 명, 남원부 성안에 근거한 자 역시 수만 명이며 잔학한 행동이 매우 심하였고 운봉(雲峰) 영장(營將) 김(金) 역시 성을 비우고 도망갔다는 내용(34), 초유사 때린 내용(40)
「영상일기」,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5, 2009, 35쪽.
8월 26일 기사
“적의 괴수 김개남은 전라도 동학 도회를 본부에 설치하고 5열을 만들었다. 전영 적장은 남응삼, 후영 적장은 김홍기, 우영 적장은 김대원, 죄영 적장은 김용관, 중영의 도통 적장은 김개남이 맡았다. 김우칙은 모주가 되었다. 각 군영이 거느린 자가 5~6천여 명이고 기타 이른바 적의 괴수는 이루 셀 수가 없었다.”는 내용
「나암수록- 220. 신식절목」
1894년 9월 일미상
“비적들이 남원부에 모여 군기를 탈취하였는데 해당 부사 윤병관(尹秉觀)은 이런 때에 고을을 비워 지키지 못했으니 단지 나문만 해서는 안됩니다. 우선 파출하고 그 대신 군무아문 참의( 이용헌(李龍憲)을 차하하여 당일로 역마를 주어 내려 보내소서. 비록 도신 김학진(金鶴鎭)일지라도, 이미 사전에 단단히 타이르지 못한 데다가 더없이 급한 이 보고를 이처럼 지체시켜 올렸으니, 경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엄하게 추고(推考)하는 형전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는 내용
「갑오사기」,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총서』 5, 2009, 72쪽.
김기범(金箕範=김개남)은 남원에 모여 15일을 주둔하면서 남원부사와 장흥부사(長興府使)를 죽였다는 내용
「갑오약력」,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총서』 5, 2009, 79쪽.
김개남은 수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남원성(南原城)에 웅거하면서 전라좌도(全羅左道)를 통할하였다.
「겸산유고」,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5, 2009, 113쪽
음력 1894년 8월 13일
손화중과 최경선이 무리를 모아 광주(光州)에 있었고, 김개남은 남원(南原)을 빼앗아 의거하고 있었다
「운봉군전주서 박봉양경력서」,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3, 2008, 241쪽
저들 무리들의 정황을 들으니 적괴(賊魁) 김개남(金介男)·이사명(李士明)·유복만(劉福萬)·남응삼(南應三) 등이 남원(南原) 토비(土匪) 김홍기(金洪基)·김우칙(金禹則)·이춘종(李春宗)·박정래(朴定來)·박중래(朴仲來)·김원석(金元錫) 등과 협동하여 성에서 버티고 있으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서로 연결하고 또 떠들썩하게 세를 과시하며 급히 운봉장영(雲峰將營)을 빼앗아서 영남(嶺南)을 유린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해학이공의 묘지명」 「담원문록」,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5, 2009, 375쪽.
남원(南原)에 김개남(金介南)이 있으니 공은 가서 합세하시오”라고 하였다. 공이 바로 달려가서 남원에 이르렀으나, 개남은 거절하고 만나주지 않았다. 오히려 해치려고 하여, 공은 옷을 바꿔 입고 달아나서 죽음을 모면하였다. 이로부터 그들과 함께 일을 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뒤 비도가 약탈을 하면서 구례에 들어오자, 공은 수백명의 군민(郡民)을 규합하여 그들을 토벌하였다.
「홍양기사」,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4, 2008, 75쪽
호남의 비요가 한창이어서 김개남(金介男)은 남원(南原)을 점거하고 있고,
「의산유고 」,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6, 2008, 75쪽1-도순무영에 올리는 글
이들이 범한 죄는 전봉준과 김개남과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도적들이 금성(錦城)을 함락시키고 무기와 물건을 빼앗고 공주를 도륙하여 사람들을 죽였는데, 이 놈들이 우두머리 짓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곧바로 순영에 보고할 것이니, 모두 쏘아 죽여서 나라의 법이 정해져 있음을 보여주십시오
「시경록」 1894년 월미상 일미상
임실(任實)에 사는 김개남(金開南)이 남원(南原)에서 무리를 모으니, 불과 한 달 안에 그 숫자가 각각 수만 수천이 되었다
「양호우선봉일기 」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7, 2010, 132쪽 1894년 12월 일 미상
-그대로 길을 가서 남원성의 북쪽 문에 도착하니, 도리에 ‘공신(拱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읍내로 들어가 민가를 살펴보니, 태반이나 불탔고 남은 연기가 아직도 많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남원성의 동문 · 서문 · 남문도 모두 불타버렸다. 거주하는 백성에게 물어보았더니, “지난 달 28일에 각 처의 동도(東徒) 몇 백 명이 이 성에 모여서 속인(俗人)의 집을 지목하여 한편으로 불을 지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약탈을 하여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계초존안」,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7, 2010, 364쪽
1894년 9월 22일
감사 김학진의 장본을 지금 보니, ‘남원부에 모여 있는 비도 5~6만 명이 각자 무기를 들고 밤낮으로 날뛰자, 전주와 금구(金溝)에 모여 있던 무리들이 이미 귀화하였다가 다시 행패를 부리고 있습니다’라는 내용
「계초존안」,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7, 2010, 359쪽.
1894년 9월 17일
-비도들이 남원부에서 무리를 모아 무기를 빼앗고 부중을 검거하고 있다는 내용
「남원군동학사」, 『신국역총서』1, 2015, 48쪽.
즉시 서로 강화한 후 각처에 말을 거두고 포(砲)를 모으며 각군에 창의사무소를 설립할 때 매소에 집강을 두고 김개남이 본군에 와서 5영을 설립하고 49일 동안 진을 칠 때 매영에 일원장, 이원장, 군수군, 영군의 직임을 두고 또 성찰, 통찰 수십 인씩을 두었다는 내용
갑오군정실기 > 갑오군정실기[甲午軍政實記] > 갑오군정실기 권9 > 12월 17일 소모관 임두학의 보고
이른바 접주 중에서도 거괴(巨魁)로, 지난번에 남원의 수령이 살해될 때 거만하게 전주의 북루에 앉아 있으면서 방자하게 흉악한 짓을 한 자입니다.
논저
논문명(서명) 저자/필자 발행연도 쪽수
「남원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 연구 –사적지를 중심으로」, 『동학학보』 33 채길순 2014
『전라도 남원 동학농민혁명』 이이화, 신영우 외 2015 91~102쪽
사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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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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