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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 정보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남원 동학농민군 유치 전투지
  • 지 역
  • 전북
  • 주 소
  • 문화재
  • 분 류
  • 정 의
관련 역사적 사실
유치는 유치재를 줄여서 부르는 명칭이다. 남원과 운봉의 사이에 있는 고남산의 봉우리다. 집강소 통치기 동안 남원에 머물렀던 김개남 부대가 청주 방향으로 진격하면서 남원에 남아있던 동학농민군은 운봉의 민보군을 격파하기 위해 나섰다.
남원의 농민군 지도자 김홍기, 유복남, 남응삼, 유태홍 등은 11월 13일 전라좌도에서 모인 농민군들을 방아치와 여원치의 갈림 길목인 쪽뚤에 진을 쳤다. 어느 쪽으로 공격해 갈 지를 눈치 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여원치로 향하는 깃대바위에 부대기를 꽂아놓고 승리를 다짐하였다. 전투는 11월 14일 새벽 4시경 시작되었다.
농민군들의 공격 낌새를 눈치 챈 운봉 수성군은 14일 새벽 2시에 2천명의 병력을 관음치 일대에 배치하였다. 박봉양은 민보군의 절반을 이끌고 산 밑으로 내려가 선제공격하여 접전할 기세를 보이다가 후퇴하여 산상, 곧 방아치 쪽으로 적을 유인하여 진을 치고 있던 민보군과 합세하여 농민군을 역공하였다고 한다. 이 때 운봉 수성군은 경상도로부터 300정의 무기를 지원 받아 전투력을 강화한 후였다.
담양의 남응삼, 남원 관노 김원석과 남원 오수 접주 김홍기, 임실 접주 최승우 등을 중심으로 남원 부동촌(釜洞村)에 둔취하고 있던 농민군은 군악을 울리며 수천 명의 병력을 산상으로 진격시켰다. 이때 농민군들을 소 떼들을 앞세우고 공격해 갔다고 한다. 11월 14일 새벽 4시경부터 시작된 전투는 다음날 아침 8시까지 약 28시간에 걸쳐 이어졌다.
방아치를 중심으로 여원치, 관음치 등 운봉과 산동 및 남원의 경계 일대 전체가 전장이었다. 치열한 전투가 끝난 결과 관군도 30여 명이 전사하였지만, 농민군 측이 입은 피해는 더 컸다. 이용석(李用石), 박중래(朴仲來), 고한상(高漢相), 조한승(趙漢承), 황경문(黃京文) 접주급 인물 5명도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박봉양경력서〉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전사한 농민군은 2천여 명에 달한다 하였다. 이 방아치 전투에서 타격을 받은 동학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운봉에서 병력을 재정비한 박봉양은 11월 28일에 재차 남원으로 출동하였다. 방아치 전투에서 기세가 꺾인 농민군들은 완강하게 방어하였으나, 서문과 남문이 불타 버리자 밀려드는 민보군을 막을 길이 없어 중과부적으로 북문으로 빠져나갔다. 〈박봉양경력서〉에는 농민군 30여 명을 사살하고 백여 명을 생포했으며, 민보군도 5명이 전사하고 부상자가 84명이라 하였다.
 
격렬했던 남원전투는 고남산을 중심에 두고 남원쪽에서 여원재에서 방아치로 방안치에서 유치로 이어졌다. 유치재가 자리잡은 곳이 바로 남원시 운봉읍의 매요리다. 매요리는 백두대간 등산로의 한 중심에 있다. 매요리는 운봉읍 소재지로부터 4㎞ 지점까지 군도 8호선이 마을 앞을 지나고 있으며, 마을 뒤로는 광주 대구 고속 도로가 통과한다. 고남산과 황산의 날줄기로 장수군 번암면의 경계선 상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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