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관음치전투는 1894년 11월 14일 남원을 지키던 농민군과 박봉양의 운봉 민보군과의 사이에서 벌어졌다. 박봉양의 민보군이 규모가 커지자 남원 동학농민군들은 남원성과 교룡산성의 무기들을 빼앗아 운봉에서 산동으로 넘어오는 방아치 아래의 부동(釜洞, 부절리) 지역으로 옮겨 민보군에 대비하였다.
농민군은 11월 13일 방아치와 여원치의 갈림 길목인 쪽뚤에 진을 치고, 운봉으로 진격하고자 하였으나 운봉 수성군은 정보를 입수하고 14일 새벽 2시에 2천 명의 병력을 관음치 일대에 배치하고 방아치 쪽으로 농민군을 유인하여 역공하였다고 한다. 박봉양의 기록에 의하면 동학농민군과의 전투는 방아치에 이어 두 번째로 이곳 관음치에서 전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전투결과 관군 30여 명이 전사하고 농민군은 이용석(李用石), 박중래(朴仲來), 고한상(高漢相), 조한승(趙漢承), 황경문(黃京文) 등 접주 급 인물 5명을 비롯하여 2천여 명이 전사하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후 박봉양은 11월 28일에 남원성을 탈취하였다. 현재 학계에서는 방아치전투, 혹은 관음재 전투로 혼재되어 기록되어 있다. 고증 후 명명이 필요하다.
고증내용
「박봉양경력서」,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3, 2008, 244~245쪽.
11월 13일에 군의 서쪽에 있는 관음치(觀音峙)의 방수장(防守將)인 전 주부(前主簿) 정두회(鄭斗會)가 와서 말하기를, 고개 아래 남원 산동방(山東坊) 부동촌(釜洞村) 앞에 성에서 나온 적들이 많이 모여서 장차 우리 경계를 넘어 침범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남원부사에게 알리고 군사를 정돈하여 수성군과 방어군 2,000명을 뽑아서 데리고 14일 축시(오전 1시~오후 3시) 쯤에 관음치 정상으로 출발하였습니다는 내용.
11월 14일 축시(丑時, 1~3시)쯤에 읍의 서쪽 15리(里)에 있는 관음재[觀音峙]를 정탐하는 군졸이 달려와 보고하기를, ‘적도(賊徒) 수만 명이 고개[峙] 밑에 있는 남원(南原)의 동면(東面) 지역 부동촌(釜洞村) 앞에 와서 모였는데 차차 산허리에 개미떼처럼 달라붙어 바야흐로 재를 뚫고 넘으려고 하니 수성군과 함께 전투를 벌였다는 내용
「박봉양경력서」,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3, 2008, 256쪽.
최초로 방아치에서 전투를 하여 거괴를 크게 섬멸하였는데 당시 선무사가 그 공을 아뢰어 참모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관음치에서 전투를 하였고 세 번째는 유치의 번암에서 전투를 하였는데, 매번 군졸들보다 앞장서서 수천 명의 적을 베고 수많은 무기들을 획득하였습니다. 승세를 타고 패배하는 적을 쫓아 남원 성 아래에 이르러 적의 예봉을 무릅쓰고 먼저 성에 올라 마침내 성을 되찾았습니다. 대개 비적을 토벌한 이래로 이처럼 여러 차례 승리한 적은 없었습니다
「영상일기」,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5, 2009, 42쪽.
적도가 운봉을 넘고자 하여 관음치 아래에 수만 명의 무리가, 박주서(朴注書)는 언덕 위에 주둔하였다. 어제 이른 아침부터 오늘 새벽까지 전투를 치렀다. 적도들이 패주하여 운봉 군사들이 승승장구하여 언덕 아래에까지 추적하여 수레와 깃발과 군수품을 많이 획득하였다. 이보다 앞서 나라에서는 운성의 방어를 엄하게 하기 위해 박주서를 순무영 참모관으로 임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