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원평 전투에서 패배한 전봉준은 태인으로 후퇴하여 김문행, 문행민, 유공만 등과 함께 농민군 5천여 명을 거느리고 1894년 11월 27일 성황산, 한가산, 도리산에 진을 치고 전투태세에 돌입히였다. 그러나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군이 한가산과 도리산을 공격하자 농민군은 성황산에 집결하여 대적하였으나 우세한 화력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성황산은 높이 126.4m의 야산으로 태인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고증내용
원평에서 태인으로 이동한 동학농민군 8천여 명은 전봉준, 김문행, 유공만, 문행민 등의 지휘하에 태인의 주산인 성황산, 한가산, 도리산 등 3개 산 9개 봉우리에 진을 쳤다. 『순무선봉진』.
농민군 두령들과 8천 여명의 농민군은 태인의 주산인 성황산과 간가산, 노리산 등에 분산해 진을 쳤다. 「전봉준과 동학농민전쟁 ④농민군의 전면 항쟁과 그 최후」, 『역사비평』, 321~322쪽.
전봉준과 김문행, 유공만, 문행민 등 4놈의 접주가 8천여 명을 거느리고 성황산, 한가산, 도리산에 진을 치고 모여 있었다. 『갑오군정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