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우금치 전투 이전, 동학농민군 남접군과 북접군 2만은 성황산에 집결하였는데 신식무기로 무장한 진압군(관군, 일본군, 교도중대)과의 우금치 전투에서 대패함에 따라 3000명 만이 생존하면서 사실상 궤멸하게 되었다.
고증내용
태인전투까지 제 19대대는 29일간 내로 농민군을 완전히 토벌한다는 계획으로 1894년 11월 12일 각자 3로로 진군했으며 그 중 1소대는 군로 조사대의 호위를 위해 14일 용산을 출발하였다. 「청일전쟁에 있어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진압」, 『열린정신 인문학연구』 6, 47쪽.
장위영의 대관 윤희영 등의 보초를 등정한 내용에 본영의 좌부령관 이두황의 지시에 따라 태인읍 주산에 둔취한 비류룰 격파한 뒤에 빼앗은 군수물의 수효를 속히 보고하고 성책은 보고해 오는 것을 기다려서 수정해 올릴 것입니다. 『선봉진서목』
장위영 대관 윤희영과 이규식이 소대를 인솔하여 원평에서 후원해 와서 바로 태인읍에 이르러 비류 몇 천명을 토벌했는데 쏘아죽인 자가 매우 많았고 생포한 자와 노획한 것도 많았습니다. 『선봉진상순무사서부잡기』
태인읍에 장위영의 양대와 일본군 64명이 와서 승리를 했으나 일본군 진영의 지시 때문에 애초에 적어서 보고하지 못했습니다. 『선봉진상순무사서부잡기』
원평에서 태인으로 이동한 동학농민군 8천여 명은 전봉준, 김문행, 유공만, 문행민 등의 지휘하에 태인의 주산인 성황산, 한가산, 도리산 등 3개 산 9개 봉우리에 진을 쳤다. 「순무선봉진」
농민군 두령들과 8천 여명의 농민군은 태인의 주산인 성황산과 간가산, 노리산 등에 분산해 진을 쳤다. 「전봉준과 동학농민전쟁 ④농민군의 전면 항쟁과 그 최후」, 『역사비평』, 321~3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