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1892년 4월 부임한 고부군수 조병갑은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기존 보가 있음에도 신보(만석보)를 막아 보세의 명목으로 농민을 수탈하여 “배들평야” 농민들의 분노를 야기시켰다. 고부농민봉기 당시 전봉준이 열거한 조병갑의 주요한 학정 8조항 가운데 두 개가 만석보와 관련이 있었다. ① 주민들을 동원하여 만석보를 건설하며 수세를 받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이후 강제로 징수한 일, ⑥ 보를 쌓을 때 수백 년 묵은 나무를 강제로 베어온 일 등이 그것이다. 만석보는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부농민봉기를 유발한 고부군수 조병갑 학정의 상징물이었던 것이다.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의 지휘 아래 1천여명의 고부 농민들은 관아를 습격하고, 만석보를 부셔버렸지만, 완전히 철거되지 않은 채 있었다. 이에 1898년 9월 고부군수로 재직중이던 안길수가 만석보(신보)를 철거하니 농민들의 원성이 사라졌음
예동마을 주민들은 이와 같은 군수 안길수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그해 9월에 마을 앞에 “군수 안후길수 만석보혁파 선정비(郡守 安候吉壽 萬石洑革罷 善政碑)”를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100여년 동안 방치되어 비문의 형태가 알아볼 수 없게 되자 뜻있는 지역주민들이 나서서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맞이하는 1994년에 비각을 세워 선정비를 보호하게 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