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전봉준은 고부의 탐관오리인 조병갑의 탁학을 시정할 것을 요구하다 장사(杖死)한 전창혁의 아들이었다. 전봉준은 서당의 훈장도 역임한 농촌 지식인이었는데 1890년 무렵, 동학에 입교 후 1892년 고부 접주로 임명받아 금구집회를 주도하였다. 이후 하층신도, 농민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사회운동을 전개해 1894년 고부농민봉기를 지도하였다. 이후 안핵사 이용태에 의해 전봉준의 생가는 방화되어 소실되었다.
고증내용
전봉준은 전북 고창읍 당촌 마을에서 출생하여 어려서 전주 구미리(현재 전북 완주군 봉동읍)로 옮겨 살다가 태인현 감산면 계봉리(현재 정읍시 감곡면 황새마을)로 이사했는데 이곳에서 18세 때 이웃 산외면 동곡리로 옮겨 살았다. 전봉준이 37세경에 고부군 궁동면 양교리(현 정읍시 이평면)루 이사했다가 다음해 이웃 조소 마을로 옮겨 살았다고 한다. 「全琫準의 革命思想考察」, 『동학연구』 12, 84쪽.
1894년 고부농민봉기 이후 안핵사 이용태에 의해 방화되었지만 다시 보수하여 사적 293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내일을 여는 역사』 2호, 152~155쪽.
조정에선 고부농민봉기의 수습책으로 안핵사 이용태를 임명했으나 이용태는 죄인을 잡아들인다는 명분을 내걸고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전봉준공초』, 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