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증내용
김개남은 19세부터 임실성 밖에서 서당훈장을 하였는데 재혼 이후 산외면 정량리 큰형의 집에서 윗지금실로 분가했으나 임실을 왕래하며 서당훈장을 했다. 「金開南과 동학농민전쟁」, 『한국근현대사연구』 2, 63쪽.
집이 있던 윗지금실은 지금재 바로 아래 동네로 상두산을 바라보며 이 지금재를 넘으면 곧바로 금구현 원평이다. 「金開南과 동학농민전쟁」, 『한국근현대사연구』 2, 64쪽.
최시형은 태인 산외면 지금실에 있는 김개남의 집에 들려 유숙하였다. 「동학농민혁명지도자 김덕명의 활동과 원평」, 『동학학보』 49, 177쪽.
임실성 밖의 서두 장씨 집안에서 훈장을 했다. 『증언록-김영기씨의 증언』
김개남의 묘역과 고택터는 군도 17호선을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으며 고택터는 마을 안에 있었으나 현재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생가터는 송월주 스님의 생가가 있는 마을에 있다. 「정읍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의 현황과 보존관리」, 『전북사학』 38, 1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