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1898년 동학의 제대 교주인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이 이곳 좌포도청 교형장에서 순교했다. 최시형은 동학의 경전을 간행하고 전국적으로 동학을 전파하며 동학의 교세확장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그는 동학사상을 당시의 조선사회에 접모하여 약자인 여성과 어린이를 존중했으며 동학의 교리를 생태적 관점으로 확장시켰다. 그는 1898년 4월 6일 새벽 관에 의해 체포되었다.
서울로 이송된 최시형은 광화문 경무청에 수감되어 10여일 동안 취조받은 후 서소문 감옥으로 옮겨졌다. 서소문 감옥에 있던 최시형은 평리원으로 재판을 받으러 다녔으며, 교수형 선고를 받은 후 6월 2일 정오 서소문 감옥에서 육군법원(陸軍法院, 전 좌포청자리)로 옮겨져 이날 오후 5시 경에 교형으로 집행되었다. 그의 죄명은 ‘유교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주장으로 세상을 어지럽혔다’는 이른바 좌도난정(左道亂正)이었다.
최시형의 시신은 광희문 밖에 버려졌으며, 이후 이종훈이 수습하여 송파(松坡)에 살던 이상하(李相夏)의 집 뒷산에 안장하였다가 1900년 3월 12일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 천덕산(天德山)으로 이장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단성사로 변한 좌포도청 자리에는 현재 단성사터로 기념되고 있고 천주교 신자 순교터, 최시형 순교지로 같이 기념되고 있다. 2016년 단성사는 주얼리 빌딩으로 재개관했으며, 이때 단성사 터 역사전시장이 조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