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동학농민혁명의 제2차 기포 당시 남원성에 자리잡고 있던 김개남은 공주로 북상한 전봉준과 함께 행동하지 않고 독자적인 행보를 보인다. 그는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9월 10일경 삼례에서 집결하여 10월 10일경 논산으로 올라가 북접의 농민군과 연합하였지만, 김개남은 이 무렵인 10월 14일 남원에서 전주로 진격하였다. 이어 금산으로 진격하여 한동안 머물다가 청주로 진격하였다. 11월 11일 진잠현(鎭岑縣)을 점령하였고, 이어 신탄진·회덕을 거쳐 13일 새벽 청주를 공격했다. 그러나 화력이 월등한 청주병영의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배하여 10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후퇴했다. 그 뒤 진잠에 들렀다가 민보군(民保軍)에게 쫓겨 연산 쪽으로 퇴각하였다. 김개남은 연산 일대에서 전봉준 부대와 합류하여 함께 전라도 쪽으로 후퇴하였음
김개남이 11월 23일 전주에서 전봉준과 헤어져 남원 방면으로 퇴각하였다가, 12월 1일 태인 산내면 종송리에서 11월 30일부터 추적해온 강화병 병방 황헌주와 전초대관(前哨隊官) 박승규가 이끄는 관군 80명과 포교 3명에게 체포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태인현 종송리의 매부 서영기의 집에 숨어 있다가 1894년 12월 옛 친구인 임병찬의 밀고로 체포되었다고 한다. 전주 감영으로 이송되었으나 전라감사 이도재가 김개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서울로 압송하지 않고 12월 3일 전주 초록바위에서 처형시켜 버렸다. 전라관찰사 이도재는 김개남의 수급(首級)을 서울로 이송하여 12월 25일 서소문 밖에 3일간 효시했다가 다시 전주로 내려보내 효시케 했으니 향년 42세였음
현재 피체지에는 민가가 들어서 있으며, 바로 옆에는 〈숲길 예쁜 펜션〉 자리 잡고 있다. 고개길을 따라 올라가면 〈임병찬 창의 유적지〉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