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무장현에서 첫 창의문을 포고한 동학농민군은 전봉준의 지휘로 감사 김문현, 안핵사 이용태를 비롯한 각지의 수령들을 공격하였다. 무장기포 이후 연합부대 동학농민군은 4월 6일, 황토현으로 이동하여 감영 병대를 공격해 승전하였고 이후 고창으로 진격해 세력을 확장하였다.
고증내용
관군들은 대덕산에 진을 쳤으며 동학농민군은 야습을 가해 승전하였다. 『증언록-고순택 손자 재호 증언』
관군이 도적을 추격하다가 고부 황토산에서 대패했다. 『번역 오하기문』, 79~80쪽.
동학군이 황토재로 올라가니 병정들이 뒤 따라 올라갔다. 『石南歷事』
백산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은 관아를 공격하여 군기와 군량을 확보하고 야습을 가하여 관군들을 황토현으로 유인한 뒤 매복공격하여 관군으로부터 승리하였다. 「황토현전투의 전개와 역사적 의의」, 『한국민족운동사연구』, 84쪽.
전라도관찰사 김문현이 난후통장 이재한과 사천군수 송봉호 등으로 하여금 포군 2000명과 부상군 1000여명으로 이끌고 전봉준과 손화중의 2개 포의 도유 만 명과 황토현에서 접전을 벌였다. 『동학도종역사』
전라관찰사 심문현은 난후통장 이재한과 전사천군수 송봉호 등으로 하여금 포군 2000명과 부상 1000명을 거느리고 4월 7일 황토현에서 접전하게 하였는데 관군이 패전하여 1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시천교종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