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조병갑은 만석보와 팔왕보 밑에 농민들의 노역으로 새로운 보를 쌓는 대신 수세를 받지 않는다고 약속했지만 이를 어기고 강제로 세를 거두었다. 또한 부빈에게 불효, 불목, 음행과 같은 죄목을 얽어 엽전 2만 냥을 늑탈하고 태인군수였던 아버지의 송덕기념비 건립을 위해 천 냥을 거두는 부정을 저질렀다. 이외에도 대동미를 정미로 환산해 돈을 거두어 불량한 쌀로 채우고 착복하는 등 각종 비리로 농민들의 원성이 컸다. 이에 전봉준을 중심으로 농민들은 고부관아를 점령하는 봉기에 앞장선다. 고부봉기에 대한 정부의 처신은 1894년 3월 20일 전라도 무장에서 전면 봉기하는 계기를 형성하는 배경이 되었다.
고증내용
초고본에서는 1894년 1월 3일 창의문을 반포한 10여 일 정도 후인 14일 고부성을 함락하였다고 서술한다. 「『동학사』의 제1차 동학농민전쟁 전개과정에 대한 서술 내용분석」, 『한국사연구』 170, 66쪽.
고부관아의 조병갑은 민보 아래에 보를 쌓게하고 조세를 부당하게 거두며 부민을 늑탈하고 대동미를 민간에 징수하였다. 고부관아를 급습한 동학농민군은 이후 군기와 군량을 구획한 이후 장성으로 진격했다. 『전봉준공초』, 12~13쪽.
1월에 호남 고부에서 민요가 크게 일어났다. 『시문기』
갑오년 정월 고부에서 난민들이 들고 일어나자 군수 조병갑은 전주로 도망쳤다. 『번역 오하기문』, 68~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