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여산지역은 동학농민혁명의 제1차 봉기 때는 별 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재2차 봉기가 시작되면서 여산은 수차례나 농민군의 공격을 받았다. 우선 1894년 9월 10일경 재봉기를 결정한 전봉준은 삼례로 가서 재기포를 준비하는 대도소를 세웠다. 이때부터 삼례의 농민군들은 주변 각지 관아를 공격하여 재기포에 필요한 무기와 전곡을 빼앗거나 수령들에게 요청하기 시작했다. 9월 10일 밤에는 삼례에 집결하였던 농민군이 여산을 공격하여 민가를 불태우고 인명을 살상하였으며, 13일 밤에는 삼례에 집결하였던 농민군이 다시 여산 관아를 공격하여 군기고를 공격하고 무기들을 탈취하여 돌아갔다. 9월 17일에는 백미 300석, 동전 2천냥, 백목 15통(同)을 여산으로 보내라는 농민군 대도소의 전통(傳通)이 고산관아에 도착하기도 했다. 여산을 또 하나의 근거지로 삼으려 했던 것으로 보임
한편 정부에서는 9월 29일 의정부에서 나주목사 민종렬와 더불어 여산부사 유제관(柳濟寬)을 호남소모사(湖南召募使)로 임명하여 농민군 진압에 앞장서도록 했다. 그러나 여산부사는 오히려 농민군에게 호의를 보이며 농민군과 합세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지영은 『동학사』에서 전봉준이 논산에 도착한 10월 12일 무렵 원래 농민군 진압을 위해 일어선 유회대장(儒會大將)이었던 이유상이 의기투합하여 전봉준과 연합하였고, 여산부사 김윤식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고 하였다. 당시 여산부사는 김윤식이 아니라 유제관이었음
또한 농민군 진압을 위해 특별히 구성된 일본군후비보병 제19대대 대대장이던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는 “여산부사 유제관의 죄상”이라는 보고서에 “여산부사 유제관은 전봉준의 영칙에 의거하여 세미 3백여석을 독촉하여 군량미로 보태 사용하였으며, 짚신 3천여켤레를 거두어들여 (동도의) 군수용품으로 조달하였다. 그리고 그 고을의 접주 겸 집강인 윤일봉과 더불어 속내를 터놓고 교제하였으며, 전봉준의 적도가 삼례에 주둔하고 있을 때 빈번하게 내왕하였고, 같은 고을의 괴수 장달원, 최난선, 오광신, 윤일봉 및 이름을 알 수 없는 진가 놈이 경내에 머무르고 있는 데도 그를 방치하고 체포하지 않았으며, 전봉준이 경계를 지나갈 때 소 7마리를 잡아 (농민군들에게) 먹였다.”고 하였음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여산부사 유제관이 여느 수령들에 비해 호의적이었음을 시사한다. 여산동헌은 전국적으로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은, 옛 모습을 간직한 조선시대 지방관청 건물의 하나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