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1894년 9월 손화중과 최경선은 제2차 기포시에 북상하지 않고 일본군이 해로를 통해 침투할 것을 대비하여 광주 일대에 머무르고 있었음
특히 나주는 호남에서 유일하게 동학농민군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지역으로 일본군이 해로를 통해 공격할 경우 나주 관군과 합세할 가능성이 매우 컸음
이에 따라 손화중은 광주 농민군과 오권선이 이끄는 나주 농민군과 연합하여 나주성을 공략할 계획을 세우고 나주에서 약 8km에 위치한 침산, 선암, 용진산 일대에 진출함
1894년 10월 20일 나주목사 민종렬은 동학농민군이 나주를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여 동학농민군의 공격을 대비하였고, 10월 21일 나주 수성군 도통장 정태완이 이끄는 수성군과 동학농민군 수천 명이 침산에서 접전하였으나, 수성군에 밀려 후퇴함
고증내용
「금성정의록」 갑편: 10월 21일, 진시(辰時, 오전 7~9시), 즉시 행군하면서 정탐병의 보고를 계속 접하니 적도(적도) 700여 명이 광주 침산(砧山)에 주둔하여 진을 치고 있다고 하였다.
「금성정의록」 을편: 10월 21일에 광주 침산에 적도가 모여들었다. 거괴 손화중이 1만여 명이나 거느리고 아침저녁 사이에 나주를 도륙할 것이라고 날마다 위협하는 말을 보내니 여러 사람들이 놀라고 성 안이 들끓었다.…(중략)…적도 수천 명이 침산 뒷 봉우리에 모여 진을 치고 있었고, 후당(後黨)이 무수히 많이 광야에 포진하고 있었다.…(중략)…먼저 침산을 깨뜨리고 그대로 파죽지세로 포를 쏘며 급히 공격하니 후진(後陣)의 적도가 수족을 둘 데가 없어 기세를 보고 도망갔다.
「난파유고」 권3 부록: 10월 21일에 광주 침산의 적도가 거괴 손화중과 연계하여 10,000여 명을 이끌고 곧 나주를 도륙할 것이라고 하였다.…(중략)…군민의 전군(前軍)과 후군(後軍)을 인솔하여 침산 아래에 당도하였다. 적도 수천 명이 침산 뒤의 봉우리에 진을 치고 있었고, 그 뒤에 무수히 많은 무리들이 넓은 들판에 포진해 있었다.
「난파유고」 권3 부록: 10월 21일 진시(辰時, 오전 7~9시)에 바로 행군을 하였다. 연이어 초탐을 접하니 700여 명의 적들이 광주의 침산에 진을 치고 있는데 기세가 대단하였다.…(중략)…일제히 쏘아죽이니 적이 상대하지 못하고 포와 창을 버리고 한꺼번에 흩어져서 도망하였다. 적진을 점거하여 깃발을 뽑고 포를 수거하였다.
「난파유고」 권4 부록: 처음에 서성(西城)에서 한바탕 크게 싸워 승리하고 비당(匪黨)을 체포하였으며, 다음에는 침산에서 포를 쏘고 습격하여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자를 셀 수가 없었다.
「난파유고」 권4 부록: 침산의 싸움에서는 비도 10,000여 명이 나주를 도륙할 것이라고 큰 소리를 쳤으나 장군이 의병을 격려하고 병사보다 앞장서서 포를 쏘며 습격하니 적이 손을 쓰지 못하고 바람에 쓰러지듯 도망을 가서 추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무기와 식량을 거두고 그 소굴을 불태워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