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이승우(李勝宇, 1841-?)는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홍주목사로 재임중 호연초토사(湖沿招討使)를 겸임하며 충청 서부지역의 농민군 진압을 주도한 인물임. 1882년(고종 19)에 증광시(增廣試)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였음. 진위현령, 용안현감, 정선·고부군수 등을 지낸 뒤 1882년(고종 19)에는 병조참의이조판서와 홍문관수찬이 되었으며, 증광감시초시시관(增廣監試初試試官)을 지냈다. 1884년 부수찬을 지냈고, 이듬해에는 선전관을 역임함. 1890년 사간원대사간이 되었으며, 1894년 4월에는 홍주목사로 부임하였다. 같은 해 9월 전라감사로 전임 발령을 받았으나, 부근의 7, 8개 고을에서 농민군 진압을 위해 전임을 취소해줄 것을 원하여 잉임됨. 1894년 10월 8일에는 충청서부지역에서 가장 큰 고을인 홍주목에 호연초토영이 설치되면서 목사 이승우는 호연초토사를 겸임하여 내포지역 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농민군을 진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함. 1895년 1월부터는 참지중추원사로 중앙관직을 잠시 맡다가 1895년 5월 이후 홍주부관찰사, 함경남도 관찰사에 재임하였으며, 1897년 중추원 일등의관, 1899년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되었다가 다시 충청북도와 전라북도 관찰사로 재임하다가, 1907년 궁내부 특진관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남
1894년 10월 이후 그가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사실에 대해 권병덕은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음. “홍주목사 이승우와 전라관찰사 이도재는 삼남에 동학군토벌을 대행하야 모조리 진멸함에 여지가 없었다. 교도를 모조리 잡아다가 목을 베어 죽이기도 하고 땅에 묻어 죽이기도 하고 목을 잘라 죽이기도 하고 불에 태워죽이기도 하고 총으로 쏘아죽이기도 하고 사지를 찢어죽이기도 하는 그 참혹한 형상과 그 부모처자형제를 연좌로 잡아다가 죽이니 만고에 없는 대학정이었다.”
그의 영세불망비 옆에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대흥군수였던 이창세(李昌世)의 〈군수이후창세애민청덕비(郡守李侯昌世愛民淸德碑)〉가 있다. 여기에는 “때 마침 큰 난리를 만나 난적들을 참초하였다(遭時大擾 亂賊斬剿)”는 구절이 들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