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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 정보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예산 예포 동학 대도소터 (예산군 삽교읍 성리)
  • 지 역
  • 충남
  • 주 소
  • 충남 예산군 삽교읍 성리 410-7 , 410-10
  • 문화재
  • 분 류
  • 점령지
  • 정 의
  • 동학농민혁명 당시 예산 동학농민군의 대도소터
관련 역사적 사실
1894년 9월 30일 기포한 내포지역의 동학농민군들은 10월 1일 태안과 서산관아를 공격하여 태안군수와 안무사 김경제, 서산군수를 차례로 묶어 타살하고 수감되어 있던 농민군 30여 명을 석방시킨 후 악질 이속들을 차단하고 호적을 비롯 각종 공문서는 불질러버렸으며, 창고를 부수고 무기와 공납전(貢納錢)을 탈취해 갔다. 이방과 교졸의 가옥들도 남김없이 부셔버렸다.
이때 이 지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것은 덕포의 박인호(혹은 박도일)과 예포의 박희인(혹은 박덕칠)이었다. 태안과 서산 관아를 점령한 이후 이들은 예산 삽교 북쪽 목소리[혹은 목시(木枾), 현 예산군 삽교읍 성리]와 덕산에 대도소를 두고 인근 읍에까지 영향을 행사하며 세력을 키워나갔고, 이에 호응하여 다른 여러 고을에서도 농민군들이 봉기하였다. 이들은 농민군을 파견하여 인근 10여 읍으로부터 군기를 몰수하여 각 지역의 도소에 유치하게 하였으며, 대도소의 비용은 인근 부호로 거두어 들였으며, 백미와 소금 등을 쌓아두고 있었다.
「홍양기사」에는 당시의 사정에 대해 “해미, 예산, 덕산 등의 고을에서는 군기를 모두 빼앗겼다. 해미성, 덕산, 대천, 예산, 목시(木市) 등지에서 진세(陣勢)를 이루어 그 무리를 나누어 보내 노점을 지켰다가 행인을 잡아 자신들이 머무는 곳에 데려갔다. 서울 양반들이 가진 농장에서 가을에 추수한 곡식을 실은 배가 미처 떠나지 못한 것을 모두 빼앗아 쌓아두었는데 마치 산과 같았다. 소, 말, 종이, 무명이 그 안에 가득하였다.”고 하였다.
이처럼 내포지역 동학농민군들이 서산 관아를 장악한 이후 점차 그 세력을 키워나가자 정부와 일본군은 진압을 서둘러 10월 10일 이후부터 본격적인 진압작전을 시작하였다. 내포지역에서 반농민군의 거점은 농민군에게 점령되지 않고 있던 홍주성이었다. 10월 8일자로 호연초토사(湖沿招討使)에 임명된 목사 이승우(李承宇)는 각 방리마다 향약과 비슷한 유계(儒契)를 설치하였고, 보부상을 동원하여 농민군을 정탐시키는 한편, 유회군과 농보군을 조직하고 관군을 보강하여 농민군에 맞서고자 하였다. 또한 인근 각 군현의 관군을 홍주성으로 집결시켜 남하하는 일본군과 경군에 호응하였다.
그리하여 제일 먼저 예포의 거점인 목시에 있는 도소를 습격하였다. 목시는 예산 삽교읍에서 북쪽에 있는 들판 작은 마을이다. 10월 11일 새벽에 홍주 목사 이승우가 이끄는 관군과 유회군의 공격에 패한 농민군 대접주 박희인은 각지 접주들에게 우수한 포수를 물색하게 하였고 10월 15일(양 11월 12일) 30여 명의 포수를 모아 4명의 접주를 대동하고 태안으로 갔다.
사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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