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7일 오전에 농민군 주둔지 관작리에서 큰 접전이 일어났다. 홍주에서 온 유회관군이 한양진격을 저지하고자 포 공격을 감행했다. 정세영은 이날 아침 일찍 군량미를 조달해주고 곡괭이를 들고 전투에 참여했다. 자라난 고향이라 지형지리에 밝아 농민군 지도부가 공격전략을 세우는데 참여해 일조했다. 그의 3로 포위공격 지략에 관군의 보루를 쉽게 탈환하였고 관군은 총 지휘관 김덕경이 죽고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포위망을 뚫고 달아났다. 한나절 전투이지만 농민군이 관군을 패퇴시키는 전과를 올려 농민군의 사기충천에 이바지 한 공로가 컸다.
이튿날 홍주성 동문 공격에 참여했지만 애석하게도 일본군의 우세한 신무기 화력 앞에 쓰러졌다. 패퇴과정이 너무나 긴박하고 일본군과 관군의 집요한 추격전이 계속되자 당시 사망한 시신을 거둘 여유가 없이 살아남은 농민군은 후퇴를 거듭했다.
각 포접 별로 주둔지에서 대책을 논의했지만 막강한 진압군의 위력앞에 속수무책이었다. 대부분 재기할 겨를이 없이 고향산천 버리고 산속으로 도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