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부여 지방의 동학농민군이 기포한 것은 9월 18일 재기포 시기였다. 소정 이복영의 <일기>에는 부여지역 동학농민혁명 초기 활동이 잘 나타나 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부여읍 중정리, 가탑리, 능산리, 염창리 일대에서 활동한 동학농민군과 관련한 기록이 확인된다. 부여 대방면 지역에 동학군이 포접(包接) 조직을 설립한 것은 6월 말에서 7월 초순 경이었다. 6월 27일경 전북 함열을 거쳐 금강을 건너 북상하던 동학농민군은 부여, 임천, 홍산, 석성 등지에서 그 지역 동학 세력과 일반 농민들의 호응 가운데 포접 조직을 확대했다. 부여의 포접 조직의 총본부는 7월 12일 대방면 중리에 위치한 민참의 집의 뒤뜰에 설치되었다.
대방면의 동학농민군은 당시 관아를 장악했을 뿐 아니라 그 지역의 보수 유학 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하였다. 당시 접주들은 중리 사람으로, “동학교도들은 대방면 사정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고리대 문제는 물론 국전(國典)의 여러 조항들을 운운할 정도로 세상 물리를 아는 사람들이었다” 고 기록하였다. 대방면 포에서는 각종 분쟁이 발생할 때마다 전체 집회 격인 도회(都會)를 열어 포 운영의 기본방침을 결정했다. 대방포는 부여지역 동학농민군에게는 중요한 장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