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보은 장내리 동학유적지는 동학농민혁명사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적 가치를 지닌 곳이다. 이곳은 1875년에 해월 최시형이 옮겨 거주한 뒤부터 동학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고 동학농민혁명기간 동학교단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곳이다.
1892년에 충청도와 전라도 감영에 교조신원과 포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단자를 올린 동학교단은 1893년 2월 서울로 올라가 <광화문복합상소>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다음 달에는 이곳 보은 장내리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척왜양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10일부터 4월 5일경까지 계속된 장내리 집회에는 약 2만 3,000여명의 동학교도들이 집결하여 척왜양운동을 전개하였다. 많은 교도들이 모여들고 그들에게 음식과 물건을 팔기 위한 많은 상인들도 모여들었지만, 장내리 집회는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었고, 수만 명의 교도들은 임시로 지은 초막(草幕)이나 장내리 등 주변 마을에 나누어 숙박을 했다. 또 교도들은 장내리 들판에 길이 일백여보 넓이 일백여보, 높이 반장 정도의 돌성을 쌓고 이곳에서 훈련을 하기도 했다.
돌성의 위치는 삼가천 인근의 ‘델타’형 지형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삼각형의 지형은 현재의 삼가천과 장내리 옛 마을 주변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삼가천 제방이 직선으로 공사를 한 이후 지형이 변했기 때문이다. 제방공사 이전의 삼가천은 현재의 차도로 이용되는 제방 건너까지 휘어져 들어왔다고 한다. 현재 돌성으로 추정하고 있는 돌 축대 아래까지 하천이 돌아나간 곳으로 보면 그 위가 삼각형의 땅 모양인 것이 확실하게 들어난다. 장내리 인근에서 ‘델타’형 지형은 이곳 외에는 찾아 볼 수가 없는 바, 현재 논 돌 축대 위 옥녀봉 아래에 있었다.
동학교단의 본부 역할을 하던 대도소는 돌성에서 서쪽으로 200여 미터 떨어진 옥녀봉 아래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논으로 바뀌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모두 먹을 수 있는 샘이 있었다고 한다. 그뒤 보은 장내리 동학집회지는 크게 훼손되지 않은 채 동학농민혁명기에 또다시 동학도 집결지로 활용되었다. 1894년 9월 18일 청산에서 기포령을 내린 최시형은 휘하 두령들에게 군중을 인솔하고 보은 장내리의 대도소로 총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보은 장내리는 수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수용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도소를 중심으로 일대에 초막을 만들어 임시로 기거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이곳에서 무기를 확보하고 군대를 정비한 뒤 북상을 위해 옥천방면으로 이동하였다.
보은 장내리가 동학농민군의 근거지라는 사실을 파악한 정부군(이두황이 이끄는 장위영과 경리청・진남영 병대)는 10월 14일 보은 장내리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동학도가 이미 10월 11일 청산으로 옮겨간 뒤였다. 이두황부대가 장내리에 도착하였을 때, 그곳에는 옥녀봉 밑에 새로 지은 큰 기와집이 한 채 있었다. 이것이 1893년 동학집회 때 사용되던 대도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을 앞 공터에는 성을 쌓고 지은 초막 400여 채와 민가 수백여 호가 있었으나, 마을은 텅텅 비어 있었고 징・북과 같은 농악기와 무기가 널려 있었다. 그래서 이두황부대는 마을을 샅샅이 수색하여 2명을 붙잡아 즉시 목을 베고 압수한 물품과 초막・민가를 모두 불태워 동학 근거지를 모두 초토화한 뒤 보은으로 돌아갔다.
1993년 충북대학교 호서문화연구소에서는 보은군과 함께 사적공원 조성을 위한 일환으로 보은 장내리 동학유적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장안마을 대도소의 위치와 집결지의 돌성터, 그리고 동학교도들이 50명씩 올라가 깃대를 세우고 있었다는 남쪽 봉우리의 석루를 확인하였으나, 사후 관리가 되지 않아 현재 축사가 들어서는 등 원형이 크게 훼손된 상태이다. 도로 옆에 2018년 12월에 건립한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고 보은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세운 장승들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