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1894년 9월 9일 동학농민군은 곤양에서 10일(양 11월 6일) 새벽에 출동하여 공격하였다. 하동접주 여장협(余章協)이 이끄는 동학군은 일본군의 하동 진출을 맊기 위해 진다리(辰橋)에서 서쪽 4km 떨어져 있는 안심리와 고하리(古下里) 일대에 수백 명의 동학군을 배치하여 놓고 있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안심리 전투에서 동학군 5명을 사살하고 28명을 생포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노획물 중에는 나팔 1쌍, 총 3자루, 큰징 1좌, 북 1좌, 도끼 1자루, 굉이 1자루, 백미 5두가 있었다 한다.
{경상도관찰사장계}에는 "9일 밤에 동도 기백 명이 하동 안심동 뒤에 있는 금오산 줄기인 한 봉우리에 둔취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밤중이라 공격하지 못하고 10일 아침에 군관 신철회·정인식이 이끄는 본군과 일본군이 같이 떠나 접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동학군 8명을 포살하였고 본군이 21명을 생포하였다. 일병에게 생포된 자도 9명이고 이밖에 총에 맞고 도망치다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리기 어렵다"고 하였다. 지방민의 증언에 의하면 "동학군은 진교·양보·고전면 일대에 퍼져 있었으며 안심리 뒷산 시루봉에는 2백명 정도가 진을 치고 있었다. 당시 안심리의 호수는 70여 호였으며 이 곳 동학군도 참가했으나 주로 양보면 동학도가 많았다. 시루봉에는 돌로 성을 쌓았고 나팔과 징과 북을 울리며 깃발을 날리니 몇 10리 밖에서도 듣고 볼 수 있는 장관을 이루었다.
그러나 동학군의 무기는 화승총과 활과 돌이었으니 일본군과 상대가 안되었다. 일본군은 산을 완전히 포위하고 신안·성평리, 그리고 시루봉 동쪽 등 세 곳에서 공격해 올라갔다. 한나절만에 동학군은 무너져 고전면 배들이 쪽으로 도주했고, 여기서도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으나 끝내 하동 방면으로 후퇴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