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옥천사는 신라의 의상대사가 〈화엄전교 십찰〉의 하나로 창건된 절로 신라 말인 효공왕 2년(898)에 창원 봉림사를 창건한 진경국사 심희(審希)가 이 절에 들어와, 먼저 자리 잡고 있던 낭림(郎林) 선사와 도반을 맺고 가람을 크게 수축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후기에 옥천사는 부찰(富刹)이었다. 사찰답 800여 두락을 인근 농민들에게 소작을 주어 5:5의 비율로 도지(수)를 받으면 1,000석을 거둬들였다고 한다. 산도 560정보로 산지기가 5~6명이나 되었다. 옥천사는 정조 말기(1800경)에 “어람지 진상사찰(御覽紙 進上寺刹)”로 지정되어 철종 14년(1863)까지 닥종이 제조부역에 시달리면서 승려들이 하나 둘 흩어지기 시작하여 불과 십여 명의 승려만 남았다 한다. 그후 어람지 진상사찰에서 벗어나면서 사세가 회복되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구한말까지 상주 승려 100~200명에 12승방과 12개의 물방앗간이 있었다 한다. 또한 “진주의 대찰 옥천사”라고 불릴 정도로 진주의 권문세가들이 시주하여 불사를 일으킨 일이 많았고, 진주목과 경상우도 감영·삼도수군통제영·고성현 등 관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1862년, 진주의 농민들이 탐관오리들의 세공미 수탈에 반발하여 “진주민란”을 일으켰을 때 성난 농민들이 옥천사로 몰려와 절 외곽의 전각을 불태우고 대종을 파괴한 일이 있었다 한다.
옥천사는 동학농민혁명 때도 농민군의 공격을 받았다. 당시 경상감사가 올린 「장계(狀啓)」에 따르면 9월 14일 진주 대가촌의 민인들이 폐단을 고친다는 명분으로 각 면에 통문을 돌려 무리를 모아 읍으로 들어가 장시에 장막을 크게 치고 주둔하였다. 이어 이들은 관아로 돌입하여 옥문을 부수고 죄수들을 풀어주었으며, 백 명 혹은 천 명씩 무리를 지어 옥천사로 가서 불당과 승사(僧舍)를 모두 불태워 없앴다고 하였다. 옥천사 홈페이지에 따르면 이때 농민군들이 몰려와 절 외곽에 있는 많은 전각들을 불태우는 다급한 상황에서 옥천사 스님들의 만류로 방화를 중단함으로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대웅전·자방루·적묵당·탐진당 등 사찰 중심부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다.
영호(嶺湖) 대접주 김인배가 9월 2일 하동부를 점령하고 관아에 도소를 설치하자 기세가 오른 진주 농민군이 진주관아, 그리고 관아의 후원을 받고 있던 부찰(富刹) 옥천사를 공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인배는 이러한 진주 농민군과 합세하여 9월 17일 진주성을 무혈입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