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동학농민혁명사 일지, 1894년 9월 18일자에는 호남 동학농민군 백여 명이 또 사천현(泗川縣)에 난입하여 질청(作廳)에서 유숙한 뒤 19일 남해로 산거하였다고 한다.
조성가(趙性家, 1824~1904) 일기 1894년 9월 13일자에는 동학농민군이 사천관아를 점거하고 무기를 탈취하였다고 한다.
서부경남지역에서도 9월 이후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가 일어났다. 이때 일어난 봉기는 주로 영호도호소에서 서부경남지역을 장악하여 동학농민군의 활동의 폭을 넓히고 일본군의 침략을 격퇴하는데 주안점이 두어졌다. 먼저 9월 1일 영호도호소 측에서 광양, 순천포의 동학농민군이 하동지역 동학농민군의 안내를 받아 섬진강을 건너 진격해왔다. 이미 하동부사 이채연은 도망갔고, 대신 主簿를 지낸 金鎭玉이 민포대장이 되어 하동읍을 방어하였다. 하동의 민포는 통영에서 가져온 대완포 12문을 강안에 설치하고 관아의 뒷산인 鞍峯에 진을 쳤다. 동학농민군은 두 갈래로 나누어 한 갈래는 섬진강을 건너 하동부의 북쪽에 진을 치고, 다른 한 갈래는 망덕진에서 배다리를 이어놓고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 부 남쪽에 진을 쳤다.
동학농민군이 하동에 진출하자, 남해, 사천, 고성 등지에서도 동학농민군이 잇달아 봉기하기 시작하였다. 남해에서는 9월 11일 호남지역 동학농민군의 지원을 받아 장악하였고, 사천에서도 9월 13일 동학농민군이 관아를 점거하고 무기를 탈취하였다. 고성에서도 동학농민군 600 명이 읍내에 머물면서 부민들을 징치하였다. 조성가 일기에서도 진주영장이 하동의 동학농민군을 효유하기 위하여 사천의 봉계에 이르렀으나, 동학농민군이 결코 흩어지지 않겠음을 깨닫고 돌아왔다고 함으로써, 사실상 하동이나 사천, 진주, 단성 일대의 동학농민군을 해산할 방도가 없음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