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홍주성 점령에 실패한 동학농민군 주력부대는 이튿날 10월 29일 해미방면으로 퇴각한 뒤, 11월 3일 예산에 재집결하여 5일 해미읍성을 점령하였다.
그 무렵 이두황은 내포지역으로 출동하여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라는 명을 받고 10월 29일 공주 광정을 출발하여 11월 6일 덕산 가야동에 이르렀다. 병력은 3개 소 대 1,800여 명이었다.
동학농민군이 해미읍성을 점령해 있다는 소식을 접한 이두황은 11월 7일 새벽에 일락치(日落峙)을 넘어 해미성을 기습공격하였다. 하루 종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 졌다. 이때 윤영렬이 인솔한 천안 의병도 이두황을 도왔다. 이 전투에서 동학농민 군은 무기마저 버리고 읍성에서 퇴각하였다. 이 과정에서 40여 명이 사살되고 100 여 명이 사로잡히는 등 수많은 희생자가 속출하였다. 살아남은 동학농민군은 다시 태안 매봉재(현 서산시 인지면 화수리 또는 음암면 신장리)에 집결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이두황은 11월 8일 저녁 다시 기습하였다. 동학농민군은 두시간 쯤 저항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화약을 폭발하여 물러날 수 있었 다. 해미의 동학 지도자 김지희를 비롯한 다섯 명이 붙잡혀 처형되었고 대포 1문, 천보총 7정, 조총 7정 등의 무기를 빼앗겨 큰 손실을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