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예천 지역의 농민군은 1894년 7월에 들어 양반가를 공격하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7월 25일 예천읍에서는 군수 이하 이민(吏民)들이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이에 대응하고자 하였다. 농민군들은 8월에 들어 예천 읍내로 들어가는 길을 차단하고 읍내의 보수집강소 세력을 압박해 나갔다. 이렇게 양측이 대치하던 중 8월 10일 예천의 민보군에 의해 감천에서 체포된 11명의 농민군이 민보군에 의해 한천의 모래밭에 생매장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분노한 농민군은 예천 읍내를 더욱 철저히 봉쇄하는 한편 관동대접(關東大接)을 상주 일대와 예천·안동·풍기(豊基)·영천(榮川)·함창·문경(聞慶)·단양(丹陽)·청풍(淸風) 등 13지역의 접주가 상주 산양(山陽)과 예천의 금곡 및 화지(花枝)에서 대회를 열고 예천읍내 공격을 준비하였다.
다급해진 예천 보수집강소에서는 8월 21일 이후 수차례에 걸쳐 안동부도총소(安東府都摠所)와 경상감영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사통을 보내는 한편 23일에는 보수집강소의 민병 300여명이 화지를 공격했으나, 윤치문(尹致文)이 이끄는 예천의 농민군과 안동·의성에서 합세한 농민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소야의 관동대접주 최맹순은 8월 24일 다시 각 접에 사통을 보내 함께 예천읍을 공격하자고 하였다. 농민군의 공격이 임박해지자 보수집강소에서는 8월 27일 총수(銃手) 100여 명을 징발하여 현산(峴山) 옆의 골짜기에 잠복시키고 밤이 새도록 지키도록 하였다.
예천읍내 공격을 처음으로 시도한 것은 예천읍 서쪽에 있던 화지 농민군이었다. 현산에 나가있던 정찰병의 보고에 따르면 8월 28일 오후 농민군 “1만여 명”이 한천 남쪽의 유정(柳汀)으로 들어가 진을 쳤다. 전투는 밤이 되어서 시작되었다. 한천제방 위에 진을 치고 있던 보수집강소의 민보군들이 서정(西亭)의 긴 제방을 에워싸고 양면에서 농민군을 협공하였다. 캄캄한 가운데 단지 유성(流星)같은 불빛만 보이고 우레 같은 소리만 들렸다. 총탄이 떨어지는 숲속에서는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어지럽게 땅으로 떨어졌으며 검은 연기가 하늘에 가득 차서 적과 아군이 구분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민보군 측과 사전에 통모한 유정 바로 남쪽의 청복동 주민들이 산 위에 횃불을 많이 설치하여 군대가 있는 것으로 위장하고 일제히 큰소리로, “안동의 구원병 3,000여 인이 올 것이다. 너희 적도들이 어디로 달아나겠는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에 당황한 농민군은 예천 동남쪽의 서정자들 쪽으로 퇴각하였다. 민보군이 추격하자 많은 농민군이 오지(汚池)에 빠져 죽거나 맨몸으로 달아나다가 민보군의 창검에 전사하였다.
고증내용
「갑오척사록」(『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 11)에 “부병(예천 민보군)들이 서정(西亭)의 긴 제방을 에워싸고 양면에서 협공을 하였다.”는 기사와 전투상황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서장자 들은 여전히 넓게 펼쳐져 있고, 현산(서본리 14 일대)은 흑응산성이며, 유정(남본리 103 일대)에는 아무것도 없어 촬영하기 곤란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