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예천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1894년 6, 7월에 들어 도소를 설치하고, 8월 초 무렵에는 조직이 완비되고 그 세력도 상당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예천 금당실의 동학농민군을 지도한 인물로는 금당실에 들어와 도소를 설치한 적성의 접주 권경함(權景咸)으로 그가 함양 박씨의 유계소(儒稧所) 건물을 빼앗아 〈금곡포덕소〉를 세우고 접주로 삼은 권순문(權順文)이 지적되고 있지만, 또 하나의 중심인물은 전기항(全基恒)이었다. 그것은 9월 13일 민보군에게 체포된 금곡 동학농민군들의 진술에서 알 수 있다. 체포된 농민군들은 취조받는 과정에서 하나 같이 금곡 동학농민군 지도자로 전도(全刀)를 지명하였다. 그는 농민군의 “모량도감(募糧都監)”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금곡 농민군을 지도했는데, 아마도 경상 북부 일대 전체를 포괄하는 군량책임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9월 13일 민보군이 들이닥쳤을 때는 이미 도주하고 없었으며, 그 휘하의 접사(接司)였던 정명언(鄭明彦)이 부권(簿券)을 관장하고 지도하고 있었다. 전기항의 고손자 전장홍(67)씨에 따르면 전기항은 “워낙 풍채가 좋아 돼지의 한문 표기 ‘전 도야지(刀也只)’로 불렸다”고 한다. 금곡 농민군이 지목한 ‘전도’는 바로 ‘전도야지’, 곧 전기항이었다. 전장흥씨에 따르면 전기항은 천석꾼으로 불릴 정도로 부농이었으나, 군비 마련을 위해 재산을 다 끌어다 쓴 바람에 농민혁명 이후 세간이 무 쇠솥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예천 읍내공방전이 실패로 돌아간 뒤 전기항은 몸을 숨기기 위해 소백산맥 기슭에 12군데 움막을 만들어놓고 번갈아 가며 머물렀고, 가족들 또한 수대를 살아온 금당실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수십 년을 산으로 숨어다니며 화전민으로 살다가 전씨의 조부 때가 되서야 이곳으로 돌아오게 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