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예천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1894년 6, 7월에 들어 더욱 활발해졌다. 예천 읍치 외곽에 곳곳에 농민군 도소가 설치되면서 외곽지역은 사실상 농민군들이 지배하다시피하게 된다. 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7월 25일 예천 읍내에서는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1,500여 명의 민보군을 모집하여 농민군에 대응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해 농민군들은 8월 2일 읍내로 들어가는 사방 통로를 막아 예천 읍치 지역을 봉쇄하는 한편, 보수집강소 세력을 압박해 나갔다.
〈정감록(鄭鑑錄)〉에 나오는 이른바 ‘십승지(十勝地)’ 가운데 하나이자, 16세기 초 명당을 찾아 이주한 함양 박씨의 세거지이기도 했던 금당실에 도소가 설치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갑오척사록〉에 따르면 금당실에 도소를 설치한 것은 적성의 접주 권경함(權景咸)이었다. 그는 권순문(權順文)을 접주로 삼고 무리들을 모집하는 한편 8월 8일에는 예천읍내의 보수집강소 앞으로 위압적인 사통(私通)을 보냈다. 그 내용은 대체로 악덕지주로 알려져 있던 읍내의 참봉 박기양(朴琦陽)과 전영장, 이유태, 선달 이삼문(李三文) 윤계선(尹啓善) 4인을 보내라는 요구였다. 이들은 이로 미루어 볼 때 늦어도 7월 말이나 8월초 무렵에는 조직이 완비되고 그 세력도 상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금당실의 농민군 도소가 설치된 곳은 함양 박씨의 유계소(儒稧所) 건물이었다. 유계소는 예천의 양반 문중인 함양박씨의 유생이 모여 문중일을 논의하거나 경전을 강론하던 곳이다. 농민군들은 이 건물을 빼앗아 이곳을 〈금곡포덕소(金谷布德所)〉라고 칭하였다.
이후 금당실의 농민군은 지속적으로 읍내의 보수집강소를 압박해 나갔다. 1894년 8월 10일 예천의 민보군에 의해 감천에서 체포된 11명의 농민군이 민보군에 의해 한천의 모래밭에 생매장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여기에는 금곡의 농민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금곡포덕소〉에서는 또다시 사통을 보내 지난 밤 잡아간 농민군 11인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결국 체포된 농민군들이 생매장된 사실을 확인한 이후에는 경북 북부와 충청도 일부 지역의 농민군까지 가세하여 예천 읍내를 공격하는 데 핵심이 되었다. 8월 20일경 관동대접(關東大接)을 비롯한 상주 일대와 예천, 안동, 풍기(豊基), 영천(榮川), 함창, 문경(聞慶), 단양(丹陽), 청풍(淸風)의 13지역의 농민군이 대회를 연 곳도 상주 산양(山陽) 및 예천 회지, 그리고 금곡이었다. 이들은 8월 28일 밤 화지 농민군에 이어 읍내 공격에 나섰으나, 민보군에 밀려 많은 희생자를 내고 후퇴하게 된다. 이후 패하여 흩어졌던 농민군 수천 명은 금곡에서 도회를 갖고 예천 읍내를 다시 공격하려 하였으나 8월 29일 때마침 원병으로 온 안동 민보군 3,500여 명과 예천 민보군이 공격해오자 사방으로 흩어졌다. 〈금곡포덕소〉는 이때 민보군의 공격을 받아 불태워졌다. 그 뒤 함양박씨 문중에서 다시 복원하여 〈경담재(鏡潭齋)〉라는 현판을 걸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