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1894년 9월 농민군의 2차 봉기 때, 최시형 등 북접지도자는 봉기를 반대하며 도리어 남접을 정벌하겠다고 나선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충청도 지역에서 강경파에 속했던 서장옥, 황하일 등은 북접지도부에 대해서 농민 봉기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는 대중 집회를 용수포에 열었다.
대접주 신재련은 진천 구만리 장터에 ‘일만명’에 달하는 동학농민혁명군을 집결시켰다. 이 조직은 교단의 방침에 따라 온건한 활동을 벌여왔으나 충주 용수포에 대규모로 집결한 황하일의 조직은, 일찍부터 급진 계열과 기맥을 통하고 있어서 서로 대립하였다고 하나 규명되지 않았다. 용수포엔 서장옥도 같이 있었다고 전한다. 용수포에 모인 동학농민혁명군은 노은 신의실을 거쳐 용원리(미륵댕이)로 이동해 갔다. 최시형이 봉기를 선언하면서 충주의 용수포와 내포에 각자 모인 부대는 대립 요인이 해소되고, 그 최고 지도자인 서장옥과 손병희는 이 미륵불 앞에서 화해하고 연합하게 된다.
이어 경기도 동학농민혁명군과 합진하고, 북접동학농민혁명군 주력의 전략에 따라 진천, 괴산, 청주, 보은 등지로 이동하였다. 맞은편 내포마을에는 동학의 충의포가 있던 지역으로 일찍이 이헌표 접주가 포교했던 마을이다. 미륵댕이는 신니면 사무소 앞의 사거리에서 518번국도를 타고 음성 금왕읍 방향으로 약 1.5KM 정도에 있는 내포교를 지나 곧바로 좌회전하여 100여미터 들어가면 있다. 유형문화재 18호인 약사여래 미륵존불이 있고, 그 뒤에는 보호수(시나무:충주 26호, 수령 360년, 높이 16m, 관리-원평마을)가 있다. 현재 동학농민혁명 관련 안내시설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