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동학농민혁명기 충청지역 동학농민군 진압은 주로 청주병영(진남영)이 담당하였다. 그를 위해서 수시로 병졸을 파견하여 동학농민군을 정탐하곤 하였는데, 10월초 영관 염도희(廉道希)는 군관 및 병사 73명을 거느리고 전라도 연산(連山)과 충청도 회령, 그리고 계룡산 인근 공주지역을 순회하였다. 이 병대는 10월 3일 공주목에 속한 한밭을 지나 강외(청원군 강외면 정중리 병마산 부근)에서 농민군의 기습을 받아 전멸한다. 이는 동학농민혁명기에 관군이 입은 최고의 피해였다.
1894년 10월 염도희(廉道希)를 비롯한 장병들이 모두 전사한 그해 11월, 왕명에 의하여 청주목사 임택호(任澤鎬)가 주관하여 청주 남다리 밖에 재단을 마련하고 갑오전망장졸 합동위령제(甲午戰亡將卒 合同慰靈祭)를 지냈다. 1895년 봄, 정부는 전몰 장병들을 서울 남산 아래 장충단(獎忠壇)에 배향하였으나, 청주 진남영은 독자적으로 동료 군인들이 추렴하여 향사답을 마련하고 매년 위령제를 올렸다. 1904년 모충단이라는 호를 받아 청주 당산에 단을 쌓고 기념비각을 건립하고, 1905년에는 진남영 장병들이 150원을 거출하여 ‘갑오전망장졸기념비’를 세웠다. 1914년에는 모충계가 주최가 되어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전몰장병 73위를 배향, 매년 음력 10월 3일에 향사하다가 일제의 신사 건립으로 1923년 고당(지금의 서원대)으로 옮겼다가, 1975년 지금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현재 모충사는 부지면적이 2,182㎡이며, 시설물로는 사당정전 54.12㎡․ 회의실 41.76㎡․ 관리사 51.84㎡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에는 중앙에 진남영(鎭南營) 영관, 대관 이종구(李鍾九), 교장 박춘빈(朴春彬)의 위패와 왼쪽에 군졸 70위, 도합 73기의 위패가 나란히 모셔져 있다. 그리고 1880년대 충청병사를 역임하고 동학농민혁명기에 양호초토사로 활동한 홍재희(弘在羲, 홍계훈)의 치적을 기리기 위한 선정비(崇政大夫行兵馬節度使洪公在羲永世不忘碑, 1888년 9월 건립)와 갑오전망장졸기념비(1905년 10월 건립)가 입구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모충사는 이 두 비석만으로도 충분히 유적지로서 보존할 가치가 있다.
모충사는 동학농민혁명군을 진압한 관군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당이다. 현재 동학농민혁명군을 기념하는 유적지나 기념관은 많으나, 진압군에 대한 유적지는 없다. 그러나 모충사와 같은 유적지도 보존하여 역사의 증거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특히 모충사는 조선시대 만들어진 사당으로서 당시의 상황을 전해주는 중요한 유적지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