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원진여 집터에 세운 기념비(1990.11.9.) : "이 자리는 원진녀씨 집이 있던 곳으로 겨레의 거룩한 스승 해월 최시형선생이 송경인이 인솔했던 경병 45명에게 포덕 39년 즉 1898년 4월 5일에 피체된 곳이다"
마을 앞 최시형 기념비 : “선생님은 포덕전 33년(1827년) 3월 21일 경주 동촌 황오 리에서 출생하셨다. 성은 최요, 이름은 시형이며 호는 해월이다. 포덕 2년(1861) 용담 에서 동학에 입도한 후 2년만인 포덕 4년(1863) 8월 14일에 최수운 선생으로부터 동학의 도통을 이어받으셨다. 포덕 39년(1898) 4월 5일 원주군 호저면 송곡(송골) 원진여 의 집에서 경병에게 체포되어 이해 6월 25일 좌도난정율로 한성감옥에서 교형을 받아 순도하시니 향년이 72세였다. 사후 9년 뒤인 포덕 48년(1907년) 7월 정부 명의로 선생님이 무고임이 공포되었다. 선생님의 최보따리라는 별호는 작은 보따리를 가지신 행장 으로 방방곡곡을 찾아 민중에게 겨레의 후천5만년의 대도를 설하시고 그들과 함께 항 상 일하면서 동고동락하셨기에 민중들이 선생님을 부르던 애칭이다.” (1990년 4월 12일)
고증내용
1898년 해월 최시형이 관군에게 체포된 원주시 호저면 송골 원진녀 집터.
1898년 2월 말에 임학선의 주선으로 원주군 송동 원진여 집에 옮겨 살았다..... 6일 새 벽에 송경인 병을 이끌고 와서 신사를 잡아갔다(<천도교회사초고> <<동학사상자료 집>>1, 484쪽)
포덕 39년 무술년(1898년)에 신사가 순도하였다. 신사는 홍천에 있는 오창섭의 집에 가 서 한달 쯤 무물다가 2월 그믐에 임학선의 주선으로 원주 송동의 원진여의 집으로 옮겼다.... 6일 새벽에 송경인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갑자기 들어가서 신사를 잡아 서울로 향했다. (<본교역사><<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 11>>453쪽
1978년 5월 27일 표영삼이 찾은 송골은 13가구의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송골 마을에 는 동학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어 남쪽으로 2킬로미터 떨어진 증골에서 정봉철(당시 67세)을 만나 송골과 동학에 관해 들을 수 있었다. 정봉철은 서당에 다닐 때 훈장으로 부터 “최시형이란 동학 선생이 ‘실람’ 바위굴에서 송골 원덕여네 집으로 왔다가 체포되 었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6.25 전쟁 전에는 천도교인들이 몇 집 있었는데 전쟁통 에 모두 어디로 떠나거나 별세해 지금은 아무도 없다고 하면서 천도교인들이 외우는 주문도 기억하고 있었다고 했다.
표영삼이 찾아간 원진여의 집은 공터가 되고 집은 없어졌다고 했다. 주민들은 원진여의 집에는 박승선이 살고 있었는데 고산 마을 이사를 했다고 해서 고산마을까지 방문해 부인으로부터 원진여의 집 구조에 대해 들었다. 부인의 말에 의하면 원진여의 집은 안 채와 사랑채로 돼 있었는데 안채는 부엌・툇마루・아랫방・윗방으로 돼 있고 사랑채는 방앗간(발로 찧는 방아)・외양간・부엌・사랑방으로 꾸며져 있었고 마당도 보통 넓이였 다고 한다. 그리고 집의 대문은 안에서 보면 오른쪽에 있었다고 한다. 해방 때까지 잘 있었던 원진여의 집은 6.25 전쟁 때 북한군이 이 마을로 들어와 숨어있는 것을 아군이 발견해 폭격하는 바람에 파괴됐다고 한다. 박 씨는 사랑채에서 약 5년간 살다가 이사를 했다고 했다. 집터의 오른쪽으로는 바위가 깔려 있고 물이 나와 집을 지을 수 없어 공 터로 둘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지금은 원진여의 안채가 복원돼 있다.(성강현, 해월최시 형 평전, <<울산저널>> 2019.10.28.)
이 마을에 거주하는 박모(72) 씨는 "생가는 복원된 자리에서 30m 쯤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6·25 때 소실됐다"며 "토지 소유자에게 부지를 팔라고 했지만 거절해 부득이 하게 현 위치에 건립했다"고 전했다.(<원주투데이> 2013.8.26.)
당초 피체지는 인근에 위치해 있었지만 6.25때 소실돼 토지소유주를 상대로 매입에 나섰지만 거절해 현재 위치해 건립했다(<<원주신문>> 2016.7.4.)
표영삼, <<신인간>> 통권 제359호, 1978.7 원래 원진여 집터 사진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