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경상도 북부지역의 활동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동학교단의 초기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1860년 경상도 경주에서 창도된 동학은 1860년대 초부터 경북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포교가 시작되었다. 이 시가에 동학의 제2대 교주 최시형은 소백산맥을 넘나들며 영남 북서부 일대의 많은 농민들을 동학으로 이끌었다. 그래서 1894년 상주‧김산‧예천‧문경 등에는 수십년 동안 동학교도로 활동해온 교도들이 많았고, 동학교단에서는 이 일대를 관동포(關東包)로 불렀다. 관동포는 경상 북부 일대 동학교단 5개 주요 거점 중의 하나였다. 9월 18일 최시형의 기포령으로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가 시작되자 이 지역은 기존의 동학교단을 중심으로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 중에서도 예천⋅문경 지역은 동학농민군과 일본군 및 민보군이 격렬하게 부딪친 지역들이다. 이 일대에는 일본군 병참부가 가까이 있어 충돌이 빈번했다. 관동포의 대접주는 이원팔(李元八)이었는데 관동포가 이 일대에서 조직을 확대한 것은 예천 소야에 근거를 둔 수접주 최맹순(崔孟淳)의 노력이 컸다. 최맹순은 본래 강원도 춘천사람으로 예천에 와서 옹기상으로 위장하여 활동했다. 공초문에 의하면 최맹순은 1894년에 42세의 나이였고 동학에 입도한지 22년이었다. 1894년에 최맹순이 이끌었던 동학교도들은 무려 ‘7만여명’이라고 관아에서 파악했다고 하는데, 그의 활동범위는 경상도를 넘어 충청도와 강원도까지 미쳤다.
예천의 동학 조직은 7월 이후 일본군과 전쟁에 대비하는 활동이 강화되면서 매우 활발해졌다. 주된 활동은 군수미와 군수전을 확보하고, 무기를 획득하는 것이었는데, 그 방법은 지주와 부농에게 강제로 헌납 받는 것뿐이었다. 7월 5일 밤 수십명의 동학교도들이 대지주인 전영장 이유태(李裕泰)를끌어내 거의 죽을 때까지 때리고 돈과 재물을 빼앗아갔다. 7일에는 향이 황준대(黃俊大)의 동생 무덤이 파헤쳐졌고, 9일에는 향리 김병운(金炳運)이 심하게 맞았고 그의 아버지 무덤이 파헤쳐졌다. 15일에는 우음동 접주 박래헌(朴來憲)이 수십명과 함께 서울로 향하던 안동부사의 행리를 습격하여 의관을 벗겨내고 행장을 빼앗았다.
예천에서는 양 세력이 충돌하는 두 가지 사건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하나는 8월 8일 읍내에 거주하는 참봉 박기양(朴琦陽), 영장 이유태, 선달 이삼문(李三文), 윤계선(尹啓善)을 지명해서 보내라고 동학농민군이 요구한 일이다. 이들은 읍내에 거주하던 예천의 대지주였다. 이유태는 경상감사와 한성판윤을 지낸 민비 측근의 권력자 이유인(李裕寅)의 아우였다. 예천집강소는 이들 지주 4인의 재산은 예천 일대 수만 농민이 생명을 유지하는 자원이 되어 왔기 때문에 무력으로 보호하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또 다른 사건은 집강소가 동학농민군 11명을 체포하여 화적죄로 처형한 것이다. 8월 9일 밤 3경 ‘화적수십명’이 약탈하고 있다고 북부 구산동 주민이 알려오자 즉시 민보군을 파견해서 체포하고 이들이 휴대한 조총․환도․철퇴도 압수하였다. 체포된 동학농민군은 오히려 민보군을 협박하였다. 그러자 집강소의 유사들은 격분하여 지체 없이 이들을 한천가로 끌고가서 생매장해 버렸다. 생매장을 당한 이들은 금곡의 동학농민군들로서 예천의 동학 조직을 관할하던 관동포가 13 접주를 소집해서 화지에서 도회를 한 다음 11명의 매살사건에 관련된 책임자를 읍내를 공격하여 보복하겠다는 엄중 경고통문을 보냈다. 그리고 예천 읍내로 들어가는 네 군데의 길목을 막아서 양식과 땔감 등이 들어가지 않도록 막았다. 읍내에 양식이 떨어져서 군수까지 죽으로 끼니를 때우게 되자 읍내의 민보군은 전면 결전을 시도하고 먼저 화지도회(花枝都會)로 민보군을 보내서 도발을 하였다.
결과적으로 민보군의 이 도발은 성공하였다. 예천의 수접주 최맹순이 읍내 공격을 결정하고 서쪽의 화지와 북쪽의 금곡에서 협동 공격을 하기로 했다. 8월 28일 낮 12시를 조금 지나 화지에서 진군한 동학농민군 ‘수천’이 읍에서 10여 리 지점까지 진군해 왔다. 유정 숲에 포진하여 한천 제방과 현산에 있는 민보군을 상대로 대치한 동학농민군은 금곡의 동학농민군의 도착을 기다리다가 예정된 시각이 지나자 독자 공격을 시작했다.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된 이 전투는 완강하게 방어한 민보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화지의 동학농민군을 격퇴하고 난 다음에 금곡의 동학농민군이 야간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렇지만 기세가 오른 민보군은 풀숲에 잠복하고 있다가 일자로 행군하며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창으로 응답하면서 개울을 건너려던 동학농민군을 양편에서 기습하였다. 어둠 속에서 복병을 만난 동학농민군은 대항할 겨를도 없이 여러 전사자를 남기고 패주하였다.
이 예천 공방전은 전봉준이 이끄는 전라도의 남접농민군 대군이 우금치 전투를 벌인 것과 김개남군이 청주성을 공격할 때 등 일부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수가 동원되어 전투를 벌인 것이다. 민보군은 1천 5백여 명을 비롯하여 읍내의 부녀자까지 동원되었는데 이를 합하면 적어도 2천명 이상이 되는 수였다. 동학농민군의 수는 4∼5천 명이라고 조정에 보고되었다. 이 보고가 사실이라면 두 차례 전투에 모두 6천에서 7천 명이 일대 결전을 벌인 것이었다. 최맹순 부자 외 예천 인근의 의성에는 동학농민군에 참여한 천인복의 묘소와 집터가 기념되고 있다. 천인복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등록되어 있는데 그에 대한 기록은 ‘경상도 의성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8월 17일 안동 근처 강변에서 민보군과의 전투 중에 사망함’ 이라고 되어 있다. 천인복에 대한 자세한 기록과 연구는 전해지지 않는다.
위의 내용은 신영우 (2006) ‘경북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전개와 의의’, <동학학보>, 10:2, 7-46에서 발췌하여 정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