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상주 농민군의 활동 역시 경상도 북부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본군의 동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5월 초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의 움직임이 어느 지역보다 직접적으로 관찰되었고, 그에 대한 민중의 반감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은 청나라와의 일전에 대비하기 위해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전선 가설을 서둘렀고, 7월 중순에는 부산·구포·삼랑진·물금포·밀양·청도·대구·다부역·낙동·해평·태봉·문경 등에 설치되었다. 각 병참부에는 일본군이 주둔하였으며, 농민군은 이에 반감을 품고 이들을 물리치려 하였다.
8월 20일경에는 이 일대의 농민군과 일부 충청·강원도의 농민군들까지 합세하여 상주 이정(梨亭)과 예천 소야 등지에 모여 도회(都會)를 열고 예천읍을 공격하려 하였다. 상주에서 농민군과 일본군 간에 직접적인 충돌이 처음으로 일어난 것은 8월 25일이었다. 농민군들이 태봉병참부를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일본군 태봉병참부에서는 부관인 대위 다케우치(竹內)에게 병정 2명과 함께 농민군들의 동태를 정찰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정찰 도중 용궁(혹은 산양) 부근에서 농민군들에게 발각되어 다케우찌 대위는 살해되고 다른 병사 1명도 손가락을 잘리고 총을 빼앗기고 도주하였다.
이에 따라 부산의 일본 중로병참감 대좌 요시가와(吉川)는 부산수비대에서 2개 소대를 이곳으로 증파하는 한편 충주와 문경 병참부에 태봉병참부를 지원하도록 지시하였다. 8월 29일 공병소위 고토(後藤馬次郞)가 인솔하는 충주병참부의 일본군 25명과 일본인부 12명은 문경으로 가던 도중 석문(石門)에서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이 전투는 전국을 통틀어 농민군이 일본군과 벌인 첫 전투였다. 당시 석문에 집결해 있던 농민군은 600여명이었으나, 불의의 습격을 받고 2명이 전사하고 다수의 부상자를 내었다. 병영으로 쓰던 11채의 가옥은 모두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졌으며, 화승총 103정, 도검 4자루, 창 3자루, 말 2마리, 동전 9관(貫)을 빼앗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