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승전목에 들어온 서로분진대의 지대병력은 1개 소대와 2개 분대였다. 그리고 통위영 병정 34명이 동행하였다. 이 지대를 지휘한 일본군 장교는 후비보병 제19대대 제2소대장인 아카마쓰 고쿠후(赤松國封) 소위였다. 아카마쓰 소위는 “지대에는 1개 소대와 2개 분대, 조선 병사 34명이 있다.”고 자신이 이끄는 병력 규모를 보고서에 기록하였다. 일본군 규모는 승전곡 전투에서 잃어버린 배낭의 수로 미루어 보면 78명이었다.
이 수는 홍주목사 이승우가 양호도순무영에 올린 보고와 차이가 있다. 이승우는 “일본 육군 소위 아카마쓰가 일본군 89명을 인솔했고, 장위영 별군관 김홍수(金弘秀)가 따라왔으며, 통위영 교장 황수옥(黃水玉)이 본영 병정 40명”을 이끌고 왔다고 하였다.
동학농민군이 ‘수만 명’을 헤아린 것에 비해 일본군 78명은 소규모로서 중과부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전에서 일본군이 갖는 위력은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외무대신 김윤식(金允植)이 충청감사 박제순(朴齊純)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군의 전투력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본군이 무장한 신식소총은 수천 명을 상대하는 강력한 무기이지만 동학농민군이 가진 토총(土銃)은 화승총으로서 볼품없는 무기라고 하였다. 비록 동학농민군이 신식소총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사용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을 뿐 아니라 탄환이 없으면 화승총 보다 쓸모가 없다고 하였다.
일본군 78명과 통위병 34명은 모두 신식소총으로 공격했다. 일본군은 후장총인 스나이더 소총을 들었고, 통위병의 무기는 기록에 없지만 스나이도소총이 아니면 마티니소총이었을 것이다. 동학농민군은 일부가 신식소총을 가졌을 것이지만 대부분 화승총이나 창칼 정도의 무기를 들었다. 아카마쓰 소위는 “적은 야포(野砲)를 소지하고 있다(우리 隊가 여미를 공격했을 때 실탄을 쏘지 않고 공포를 쏘았음). 소총은 탄환 효과를 가늠컨대 후장총(後裝銃)인 것 같다.” 고 보고하였다.
동학농민군에게 일본군은 마주 싸우기 어려운 상대였다. 괴산에서 붙잡힌 충주의 동학농민군 지도자가 말한 내용에 그 실상이 드러난다.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이 없는 곳을 찾아서 지나간다.” 고 위축된 모습을 전하고 있다. 그렇지만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조우하거나 부득이 장애가 될 경우에 1대 100명꼴로 싸운다.” 고 하였다. 일본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이 직접 일본군과 싸우는 것을 회피했고, 부득이한 경우에만 싸운다고 하였다. 처음부터 일본군을 두렵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포 일대는 일본군의 위력을 직접 겪었던 지역이었다. 청일전쟁의 시작인 풍도해전이 이 일어난 아산만이 당진과 서산 그리고 태안 인근 바다였다. 바닷가 마을은 일본 해군 제1유격대의 함정과 청국 북양함대 소속의 함정이 쏘는 함포의 소리가 들리는 거리에 있었다. 일본군에게 나포되지 않고 태안 죽도에서 하선한 광을함 선원들이 태안에 들어온 후 아산과 성환으로 호송된 사실을 전해들은 곳이었다.
또한 6월 27일(양력 7월 29일) 새벽 성환에서 벌어진 청국군과 일본군 간의 전투로 인해 내포의 여러 군현에서 시련을 겪었다. 아산, 서산, 해미, 홍주, 덕산, 예산은 청국군 패잔병이 도피하는 길목에서 피해를 입었고, 이어 이들을 추격하는 일본군이 약탈 파괴 방화 위협 등을 가해서 피해를 입었다. 성환전투에서 일본군이 일방적으로 승리를 한 사실을 가장 일찍 듣고 동시에 일본군의 추격 과정을 목격했던 곳이 내포지역이었다.
일본군의 위력을 잘 알고 있던 내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기 위해 무장봉기한 사실은 주목을 받아야 한다. 내포의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만나서 결코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승전목전투는 동학농민군이 승리한 전투로 귀결이 되었다.
일본군을 물리치거나 커다란 피해를 준 전투는 안보전투(양력 10월 27일, 음력 9월 29일)와 괴산전투(양력 11월 2일, 음력 10월 5일)가 있었다. 이들 전투는 동학농민군이 비교하기 어려운 전투력 격차를 이겨낸 전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