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조선 후기 청주병영(진남영)이 있었던 청주읍성은 9월 이후 동학농민혁명기에 동학농민군과 반농민군 사이에 3번의 격전이 치러졌을 정도로 요충지였다. 특히 청주읍성은 서울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군사요충지였기 때문에 동학농민군 입장에서는 지속적으로 점령을 시도하였다.
첫 번째 전투는 9월 하순에 있었다. 1894년 9월 18일 최시형의 기포령에 따라 북접 산하의 농민군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이들이 최초로 집결한 곳은 충주 황산과 진천 구만리 등이었으며, 늦어도 9월 23일경에는 청주 주변에서도 손천민 등이 이끄는 농민군이 집결해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손천민 등은 9월 23일부터 농민군을 거느리고 청주읍성을 포위하기 시작하였고 다음 날 청주성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청주병사 이장회(李長會)는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기만 하며 원병을 기다렸으나, 원병이 오지 않자 직접 병사를 이끌고 나가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 수십 명이 목숨을 잃고 퇴각하였다.
청주 병영의 군사들은 동학농민군이 섣불리 공격하기에는 상대적으로 무기가 우수하였고 훈련도 잘 되어 있었다. 청주성 공방전이 끝나고 청주 병사는 군관 이용정(李容正)에게 병대를 이끌고 청주 일대의 농민군 근거지를 순회하게 하였다. 이때 손천민의 근거지인 솔뫼마을은 철저히 파괴되었고, 동학농민군들도 보은으로 후퇴하였다
두 번째 전투는 10월 29일 동학농민군이 다시 청주성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진남병이 파악한 정보로는, 청주공격을 준비한 동학농민군은 연기로 이어지는 길을 막아 후방을 안전하게 만든 다음에 다른 부대가 청주성을 공격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 문의에 있던 약 30명의 진남병과 증약의 농민군을 공격하러 갔던 미야모토(官本竹五郞) 소위 인솔 하의일본군 중로군 지대가 청주성으로 회군하자 대부분 피신였으나, 그 정보를 알지 못한 일부의 농민군이 청주성 남문 밖에서 공격신호를 대기하다가기습을 당해 16명이 체포되었다.
마지막 세 번째 전투는 김개남(金開南)의 부대가 청주읍성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김개남은 10월 14일 남원에서 출병하여 임실을 거쳐 15일 전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전주에서 주둔하였다가 11월 초순 북상하여 은진, 연산을 거쳐 청주로 향하였다. 11월 10일, 진잠을 거쳐 대전 유성으로 행군한 김개남부대는 12일 밤 동학농민군을 두 부대로 나누어 신탄진과 문의방향으로 진군, 청주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날 청주성에는 일본군 1개 소대 병력이 들어와 방어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일본군 보병소위 구와하라(桑原榮次郞)가 이끄는 군로조사호위대가 문의를 출발해서 12일 청주에 도착하자 오후 8시에 충청병사 이장회가 구와하라 소위를 찾아와서 동학농민군 대부대가 청주로 오고 있다고 전하며 구해주기를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11월 13일 오전 6시 40분에 일본군 척후 보고에 의하면, 신탄진 방향에서 1만 5, 6천명의 농민군이 문의 방향에서 진군하던 약 1만여 명과 합세해서 청주로 향하다. 당시 일본군의 구와하라 소위가 정리한 기록에는 “일본군은 청주 남문 앞의 고지(高地, 청주에서 600m 떨어진 곳)를 점령 ․ 잠복하여 농민군을 기다렸다. 농민군이 청주성 400m지점까지 진격하였을 때 배측면(背側面)을 기습공격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청주읍성 남문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무심천의 삼각주들을 이어주는 남석교(현재 육거리시장에 묻혀 있음)를 지나쳐야만 했기에 이 근처에서 전쟁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의 청남교 - 한국병원일산웨딩프라자 - 육거리 시장으로 이어지는 선이 신탄진에서 청주성 남문을 향하는 길목이었고, 또 이 선의 측면에 있는 현재의 일산여고 자리 주변이 완만한 고지였다는 점에서 이 선을 따라 전투가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전투에서 김개남부대는 20명의 전사자를 내고 약 10리가량 후퇴하였다. 11월 13일에는 진잠을 거쳐 14일 연산에서 다시 집결하여 오전 11시경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오후 4시쯤 노성과 논산 쪽으로 후퇴하였다. 김개남과 전봉준은 11월 14일 밤 논산에서 합류하였다.
청주읍성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며, 동서남북으로 성문이 있던 터에 비석이 세워져 있어 그 위치와 규모를 가늠하게 한다. 청주읍성 전투가 있었던 곳은 현재 불확실하다. 다만, 김개남이 지휘한 세 번째 청주읍성 전투의 경우에는 자료가 많이 남아 있어 어느 정도 주요 전투지를 추정할 수 있는데, 육거리시장-청남교-금석교로 이어지는 삼각주 주변지역이었다.
동학농민군의 청주읍성 전투를 기념해 충북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는 육거리시장이 바라다보이는 청남교 아래 무심서로 무심천 옆에 2009년에 동학장송공원을 조성. 매년 기념행사와 함께 장승 2기를 세우고 있다.
고증내용
1894년 9월 동학교단의 기포 이후 3차에 걸쳐 동학농민군이 청주읍성을 점령하기 위해 공격하였는데, 그 가운데 위치를 알 수 있는 것은 1894년 11월 13일 남원에서 북상한 김개남부대의 전투지이다. 김개남부대의 청주읍성전투는 남석교를 사이에 두고 전투가 벌어졌는데, 현재 남석교가 묻혀 있는 육거리시장에서 청남교-금석교로 이어지는 삼각주 주변지역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