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모서는 화북, 화동, 화서, 모동 등과 함께 상주지역에서도 농민군 세력이 특히 강성했던 지역이었다. 이들 지역에서는 평천민 뿐만 아니라 화서의 강선보나 모서의 김현영과 같이 양반의 후예들 가운데서도 농민군 지도자가 나와 농민들과 함께 양반지주와 토호들을 공격하며 기왕의 향촌지배질서에 도전하고 있었다.
모서 농민군의 중심지는 사제(社堤)였다. 여기에 모서 농민군 지도자 김현영(金顯榮)의 집이 있었다. 김현영의 집안은 원래 무반 가문이었다. 그의 증조 정현(正鉉)은 헌종대에 훈련원 첨정(僉正)을 역임한 무관이었으며, 그의 아들 제민(濟珉)은 중간거래상을 하여 모은 재물로 토지를 사들여 “수백석”을 추수하는 지주로 성장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김현영의 증손대에 와서 집안 전체가 동학에 가담하였다. 현영(君五, 1849-1911)은 그의 동생 현동(顯東)(君仲, 1850-1894), 현양(顯揚)(君一, 1864-1945)이 모두 동학에 입도하여 동학농민전쟁 당시에는 농민군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김현영은 1892년 접주로 임명되었으며, 1894년에는 대접주로서 상주 지역 농민군 지도자로 활동하였고, 그의 동생들은 모두 접사(接司)의 지위로 농민군을 이끌었다.
이들은 상주관아를 점령했던 농민군이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흩어진 다음에도 다시 세력을 모아 상주성을 재점령할 계획을 세우고 은밀히 활동하고 있었다. 모동 용호리(龍湖里)의 접주 남진갑(南進甲)·이화춘(李化春), 그리고 같은 마을인 모서 사제(社堤)의 접사 구팔선(具八善), 유학언(劉學彦) 등과 함께 11월에 다시 상주를 함락시키고 무기를 탈취하려는 거사를 계획하고 기포 통문을 만드는 등 재기를 도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1월 13일 자원하여 상주 소모영의 유격장이 된 김석중(金奭中)이 별포군을 이끌고 14일 새벽 이들이 집이 있던 사제와 용호리를 덮쳤다. 이 가운데 남진갑은 체포되었다가 도주하였으나, 이화춘 구팔선 김군중 유학언 등 4명은 체포되어 11월 14일 낮 12시경 중모시(中牟市)에서 문초를 받은 후 포살되었다. 대접주 김현영과 그의 다른 동생 현양은 체포되지 않았으며,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다음에도 동학에 관여하다가 각각 1911년과 1945년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