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솔뫼마을은 1892-93년 동학 교조신원운동 시기부터 포교와 교단활동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으며,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도 청주지역 동학농민군의 근거지가 된 곳이다.
1892년 10월 공주취회 때 솔뫼마을 손천민의 집에 의송소를 정하고 준비하였으며, 1893년 2월에 일어난 <광화문복합상소> 시기에도 이곳에서 상소문이 마련되었다. 시천교종역사(侍天敎宗繹史)에 의하면, 동학교단에서는 1893년 2월 광화문 복합상소를 앞두고 소장 준비를 위해 청주군 송산리(松山里) 손성렬(孫星烈)의 집에 봉소도소(奉疏都所)를 마련하고 소장을 준비하였다. 상소문은 서인주(徐仁周), 서병학(徐丙鶴) 등이 주동이 되어 작성하였다. 송산리는 바로 솔뫼마을이고, 성렬은 손천민의 자(字)이다. 그는 의암 손병희의 7세 위인 적조카(嫡姪)로 충청지역 동학 대접주를 지냈다.
솔뫼마을에서 교조신원운동을 주도한 손천민은 동학농민혁명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청주 일대의 동학조직은 여름부터 무장 봉기에 대비해 치밀한 준비를 하였다. 남일면 송산리에 있는 청의대접주 손천민의 집이 근거지였다. 솔뫼의 앞산 노가지봉은 한눈에 청주 남들과 읍성이 내려다 보이고 멀리 문의 벌판과 보은쪽 길이 바라다 보이는 곳으로, 동학농민군의 근거지로 삼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이곳으로 모여든 동학도들은 화승총과 칼・화약을 마련하고 마을 뒤쪽 신대(新垈)의 골짜기에서 훈련도 하였다. 이때 솔뫼마을에 살던 강영문(姜永文)이 손천민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렇게 준비를 마친 청주지역 동학농민군은 손천민 등의 지휘로 9월 23일경부터 청주성을 공격하였으나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청주병영은 동학 근거지로 지목된 솔뫼마을 등에 군대를 보내 철저히 초토화하였다. 동학도들이 머물던 집은 불태우고 동학 지도자들과 그 가족들의 목을 잘라 처형하였다.
고증내용
1892-1893년 동학교조신원운동 때 손천민 집에서 준비를 하였고 동학농민혁명 재기포 때는 청주성 공격을 위한 거점으로 활용된 마을로, 시천교종역사 , 양호우선봉일기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솔뫼마을은 신송리 1구로 신송리 북동쪽에 있으며 최근 급격한 도시화로 전형적인 농촌마을 모습이 아니다. 동학농민군의 훈련장으로 사용되던 노가지봉(-솔뫼마을 북쪽에 오래된 노가지나무가 있어 노가지봉이라 불림)은 솔뫼마을 뒤편에 위치해 있다. 손천민이 기거한 도소는 신송리 202번지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가였으나, 현재 철거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손천민의 집터 뒤에는 교회가 자리 잡고 있다. 교회 뒤쪽의 언덕으로 올라가면 아래로는 낮은 지대가 펼쳐지고, 청주시가 내려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