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청일전쟁 당시 군수물자 공급을 위해 일본은 서울~부산 사이 주요 교통로에 약 40리 마다 약 40여 명 규모의 병참부를 설치하였다. 1894년 9월 22일 상주읍성이 동학농민군에게 점거되자, 이들의 봉기 목표가 일본세력의 축출인 것을 잘 아는 낙동의 일본병참부에서는 우세한 화력을 바탕으로 9월 28일 10시 무렵 사다리를 이용해 성벽을 넘어 들어와 조준 사격하였다. 이에 10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퇴각한 농민군은 남접군과 합세하여 공주 우금티 공격에 나섰으나 패하였고, 보은 북실마을(종곡리)에 재집결했다가 12월 17~18일 간에 상주소모영 유격병대와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2,600여 명이 희생되었다. 이로써 북접농민군은 마지막 명맥이 끊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