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동학농민군의 1대는 이인전투에서 승리한 후 바로 이어서 음력 10월 24일 새벽 공주감영의 뒷산인 봉황산을 포위했으며, 다른 1대는 무너미를 넘어 효포를 공격해서 점령하였다. 효포를 지키던 관군과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의 사기에 놀래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도주하였다.
조선정부의 「관보」에는 관군이 효포전투에서 제대로 싸우지 않고 패주한 것을 뱃사람의 말을 인용하면서 마치 관군이 동학의 대군을 피하여 철수한 것처럼 기록해 놓았다.
날이 밝은 후에 금강 나루의 뱃사공이 찾아와 보고하기를, ‘효포에 주둔한 留陣兵이 이른 새벽 달빛을 타고 강을 건너 가버렸다. 일본군 소위도 비록 여러번 만류했으나 다음에 만나자고 말하고 (유진병이 떠났으므로) 드디어 (일본군도) 이른 아침 북상하였으므로, 인심이 흉흉하고 의뢰할 곳이 없어 소란이 크게 일어나서 진정시킬 수가 없다’고 하였다. 진시에 봉수에서 연기가 일더니 적병(동학농민군-인용자)이 크게 이르렀다고 보고하여 표로에 방비가 없어 무인지경과 같이 들어온 것을 알았다.
그러나 효포전투는 동학농민군이 대규모로 공격해 들어오자 효포를 지키고 있던 관군과 일본군 중에서 관군이 먼저 도망치고 뒤이어 만류하던 일본군도 패주한 전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곰나루(熊津)에 동학군이 나타나 봉황산 하고개를 공격할 것이라는 급보가 들어왔다. 충청감사가 놀라 영기(令旗)를 띄워 이인에 나가 싸우는 관군과 일본군을 불러들였다.
곰나루에 나타난 동학군은 손병희 군의 선발대였을 것이다. 손병희는 옥천에 유진하고 있다가 ‘북문외’로 가서 매복하라는 전봉준의 전갈을 뒤늦게 받고, 23일 삼경(三更) 비가 그치자 오경(五更)에 공주 ‘북문외’를 향해 장도에 올랐다. 온종일 백여 리를 행군하여 저녁때 한다리(大橋) 인근 ‘한솔벌’에 다다랐다. 그 무렵 금강진(錦江津)을 지키던 경리청 대관 백락완(白樂浣)이 금강 북안을 순시를 하다가 동학군(遊匪) 수십 명을 잡았다. 그들을 국문해 손병희 군이 한다리(大橋) 인근에 유진했고, 명일 전봉준 군과 합세하여 공주성을 공격할 것을 알아냈다.
전봉준은 이인에서 저녁때 관군 일본군이 갑자기 전투를 중지하고 공주성으로 들어간 이유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이인에서 수성군의 방어 장벽이 높아 우금치 진입작전이 어렵다고 판단한 것인지, 다음날 손병희 군이 ‘북문외’로 오면 합세해서 능치(陵峙, 熊峙)를 공격하겠다는 생각으로 방향을 경천으로 틀었다. 또한 대교를 점령했던 북접의 손병희부대(통칭 영동·옥천포)는 안성군수 홍범섭의 관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물리치고 철수하여 전봉준부대와 합류하였다.